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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르페디엠 Nov 24. 2023

아기를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요?

회사 선배의 한마디

신입사원 시절,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었던 직장 선배님이 있다. 입사 후 셔츠에 블레이져를 입고 회사에 처음으로 출근했는데, 그 선배는 내게 '너 그렇게 입고 다니면 선배들에게 재수 없단 소리 들을 수도 있다.'라며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첫 만남부터 이 선배에게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털털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라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던 나였는데 마음 한편에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달까.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어느덧 입사한 지 9년 차. 내가 입사했을 때 과장급이었던 선배는 이제 부장급이 되었고 나는 당시 선배 정도의 포지션이 되었다. 이 선배 업무가 겹치는 일이 없어 자주 뵙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오며 가며 마주쳤고 그때마다 아주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곤 했다.


서론이 길었는데, 지난주 사무실 복도에서 우연히 (또)마주친 선배가 너 얼굴 좋아졌다? 살이 좀 찐 건가? 이러시는 거였다. 나는 결혼하고 살이 좀 쪘죠. 맞아요라고 답했다. 결혼 후 실제로 6킬로 정도 몸무게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배는 단순히 살이 쪘다기보다 인상이 좀 변했다고,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예전에는 조금 예민해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표정이나 분위기가 차분하고 편안해 보인다고.


나는 답했다. 아기가 생기니까 인생이 되게 단순해지더라고요. 매 순간순간에 집중하게 되고, 웃을 일도 많이 생기고요. 뭐랄까,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한 편으로는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육아와 일에 제대로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거죠. 여유도 별로 없고요. 후훗.


선배가 말했다. 그래. 사람들이 애 키우기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세상에서 애 키우는 게 가장 쉬워. 야, 출근해서 봐라. (손으로 사무실 여기저기 가리키며) 문제가 얼마나 많니? 이게 해결이나 될지 잘 모르겠다. 아이 키우는 건 답이 있잖아. 울면 놀아주고, 안아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또 웃으면 얼마나 예쁜지.


선배와 복도에서 나눈 1분간의 대화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아기를 키우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태어남과 성장을 옆에서 매일 지켜볼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좋은 건축, 그림 보러 다니는 걸 꽤나 좋아하는 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리 멋진 그림을 감상하는 것보다, 웃는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 내 안에 훨씬 큰 감동과 영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아들의 웃음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 큰 행복을 선사하고, 웃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그렁 맺히곤 한(청승).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할 때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부족한 것을 본다고 다. 나의 경우엔 낭만이었다.

엔지니어로 오랜 기간 일했기 때문에 업무 관련 대화는 데이터와 현장에서의 현상 및 설비에 대한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데이터에는 항상 기준점이라는 게 있었고 그래서 지금 문제가 있어 없어?라는 상사의 질문에 '기준점 이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문제가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매번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했다. 공학도라면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데이터에는 중간이 없다. 기준점보다 초과면 잘못된 거고, 미만이면 괜찮은 거다.


대개의 경우 이와 같은 이분법적 논리는 정신건강에 이로운 점이 꽤나 많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도 인간이지 않은가. 내 인생에도 뭔가 둥글둥글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모네의 연꽃 시리즈에 유난히도 마음이 갔다. 둥글둥글 푸근한 수련과, 모네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서정적인 컬러링은 내 마음에 평화를 주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판단 없이, 모네의 연꽃 그림 앞에서 수십 분간 서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내 마음과 일상을 재부팅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요즘 잠으로 재부팅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들 분유를 먹이고, 출근 후 회사에서는 일을 열심히 하고, 퇴근해서는 마지막 수유를 하고 안아서 잠을 재운다. 아기가 잠이 들면 하루간 쌓인 집안일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밤 9시~10시다. 솔직히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이유 없이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도 내 인생은 충분히 힘들었다. 인생을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것이다. 다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의 파이가 훨씬 커진 것 요즘이다.


아기를 낳을지 고민 중이시라고요? 오늘 저녁, 당장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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