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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Nov 28. 2023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른 마음과 작별하는 법


    며칠 전 보이스피싱 사고 피의자의 재판 판결문을 열람했다. 지난 몇 개월간 스스로를 괴롭게 했던 죄책을 겨우 벗었고 이미 끝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적어도 피해금액의 일부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배상청구인들의 신청을 모두 각하한다'라고 쓰여있었다. 첫 재판 결과에 불복한 피의자는 변호사를 선임해 항소했고, 결국 원하는 대로 감형에 성공했다. 검거 전까지 2주간 서울과 경상남도 일대를 돌며 열 명이 넘는 피해자들에게 9억이 넘는 현금을 받았는데 이게 말이 되나. 판결 결과를 납득할 수 없어 감형의 이유를 찾아 읽었다.



  그는 범죄에 단순 가담한 현금수거책으로서 한국 국적이 아닌 중국인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고 범죄 사실 모두를 인정하고 있으며 피고인이 실제 취득한 경제적 이익이 많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또한 그의 나이가 어린 점을 고려해 감형한다고 적혀 있었다. 확실히 범죄에 가담했고 나를 포함해 피해자들에게 스스로를 금융감독원 직원이라 속였고 그에 대한 증거가 있는데도, 판사는 모든 피해자들의 배상청구 명령을 각하하고 4년 징역형을 선고하며 판결을 마쳤다.    

 



   잃어버린 돈을 되찾기 어렵다는 것은 사고 직후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서 진술하면서 확인했다. 보이스피싱은 철저히 자기 신분을 감추고 목소리로 사기 치는 조직이기 때문에 그들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도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금 수거책을 잡아도 대부분의 피해금액은 몇 시간 안에 해외로 넘어가 그 출처를 알 수 없고, 현금 수거책이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돈을 되찾을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가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증거가 있었고 그의 얼굴을 보고 속아서 현금을 건넸으니 당연히 피해 금액의 일부라도 배상하도록 명령할 줄 알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잃어버린 돈은 일체 돌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일로 십여 명의 피해자들에게 챙긴 돈이 몇 억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푼도 배상하도록 청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 올랐다. 명백한 피해를 입혔음에도 피해 사실이 아닌, 그것으로 취한 이득의 많고 적음을 고려하여 배상청구 명령을 각하한다니. 피의자에게 불리한 상황을 고려하여 감형시켜 준 결과로 도리어 피해자의 고통이 가중된, 모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 주 전 남편과 보이스피싱 사고로 인해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무거웠던 짐을 이제 벗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저 운 나쁘게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 뿐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미 끝난 과거를 되새김질하듯 돌아보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고 했다. 비록 금전적인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나 자체는 사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그대로니 더 이상 그때의 기억이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모든 일은 끝난 과거라고 말하며 드디어 마음이 자유로워졌건만. 남편과 판결문을 읽으며 기껏 떠나보낸 과거를 되감아보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판결에 불같이 화를 냈다. 피의자는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9억이 넘는 돈을 빼돌렸는데, 고작 4년 동안 몸으로 때우고 끝이라니. 1년에 2억씩 버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며 울분을 쏟았다. 그가 항소를 위해 선임한 변호사도 그 조직에서 선임해 주었을지 모를 일이라며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면 금전적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갖은 의심을 쏟아냈다. 그저 화만 돋우는 그 답답한 대화는 짙은 한숨과 함께 소강되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이른 퇴근길이라며 저녁에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는 말로 멈췄던 대화를 이었다. 순식간에 저기압을 찍은 내 기분을 살피는 그의 배려에 좋다고 답했다.      

   


  아무리 말을 보태도 달라질 것 없는 판결문을 덮어두고 잠자코 업무를 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뜻대로 감형을 쟁취해 낸 피의자의 교도소 생활을 떠올리다, 그에게 닿지 않을 분노를 키우는 것이 너무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분노의 대상이 누구 건 간에 이 사건으로 일어난 분개심은 지난 몇 개월간 나를 다만 괴롭게 했다. 이제야 정말 살만해졌는데, 저 판결문을 읽은 후로 마음이 역행하는 듯했다. 이러한 판결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또다시 분노로 가득 차기를 바란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불쑥불쑥 솟구치는 화에 동조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한 건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미워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크나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에너지 중에 조금도 그들을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분노라 할지라도 그곳에 쏟는 감정과 시간이 아까웠다. 일순간 나에게 일어난 사건과 연관된 사람들을 떠올리기를 멈췄다. 스위치를 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과 기억을 비추는 불을 껐다. 불행의 기억은 훤한 것보다 어두운 편이 나았다.      



  퇴근이 가까워 올수록 나를 걱정할 남편의 얼굴이 선했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기운이 고스란히 상대에게 흘러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빠르게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서늘한 바깥공기를 쐬니 답답했던 마음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곁가지처럼 뻗친 생각이 걷혔고 금세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보이스피싱을 당한 것이 나의 모자람 때문이고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라는 그른 마음에 사로잡혀 있던 과거에는, 하릴없이 치솟는 분개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더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른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이미 끝난 과거를 마주했을 때. 불행으로 회귀할 것인지, 뫼비우스의 띠 같은 불행의 고리를 끊고 과거와 작별할 것인지.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완전히 알고 난 후부터는 전부 내 선택이라는 것을 자각하자,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선명히 보였다. 여전히 분하고 속상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감정에 취해, 지난 몇 개월간 우울했던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과거에 목매기에는 남은 삶이 더 소중했다. 지루하게 이어온 고통을 끊고 겨우 쟁취한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도
바로 인식하게 된 덕분에 행복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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