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어릴 적 유독 외할머니가 죽는 꿈을 자주 꾸고는 했다. 초가집 대문에는 상 당했음을 알리는 등불이 걸렸고 상여꾼들이 무거운 관을 어깨에 이고 나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구슬피 우는 곡소리가 너무도 실제처럼 느껴져 항상 울면서 잠을 깼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꿈은 반대라며 할머니가 오래 사시려나 보다,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 꿈 덕분인지 정말 외할머니는 아흔을 목전에 둔 무렵까지 사셨다.
외할머니와의 사이는 유난히 각별했다. 약하게 태어나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낼 때. 엄마가 없을 때마다 빈자리를 대신해 준 사람이 바로 외할머니였다. 휠체어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탓에, 밥 먹는 것부터 화장실 가는 것까지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들었다. 그녀는 내가 심심해할 때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나의 세상은 네모난 창틀 밖 풍경이 전부라,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었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도, 볼 수도 없는 바깥세상 이야기는 흥미가 없었다. 마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만 아는 '비밀열쇠'가 하나씩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더욱이 즐겨 들었다. 외할머니가 떠난 지 오래된 지금까지도 선한, 그 이야기가 불현듯 마음을 두드렸다.
여섯 살이 되던 해, 휠체어 없이 걸어서 퇴원하게 되면서 병원에서는 '기적의 아이'라 불렸지만 그저 걷기만 할 뿐 남들과 다른 모습 때문에 소란한 삶을 살았다. 온 세상 만물이 낙화하듯 하던 어느 해 가을, 외할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 몸 중에 가장 어린 곳이 어딘지 아느냐고. 그 말에 기나긴 재활에도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우유를 먹으면 키가 크는 것처럼 힘없이 주저앉는 다리가 무쇠로 변하는 음식은 없는지 물었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올랐다. 일순간 질문도 잊고 피식 웃던 찰나 그녀가 답했다.
사람 몸 중에서
눈이 가장 어린 거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후로 몸이 자라고 심지어는 머리카락과 손톱도 끝없이 자라, 몸 전체가 알아서 자라는 것 같지만 눈은 결코 저절로 자랄 수 없다고 했다. 노안이 오고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사람이 쇠하는 과정일 뿐. 아이 어른할 것 없이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어린것은 눈이라고 했다. 그녀는 각자 자기 능력으로 키운 눈이 무엇을 비추는지에 따라 철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며, 철없는 눈으로 보고 뱉는 이들의 말을 다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만, 눈을 키우는 것은 오직 제 몫이니 내 눈이 철들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부끄럽게도 당시에는 이 말을 듣고도 바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장애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 같았고 짓궂은 아이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될 때마다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말로만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지, 실상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눈앞의 현실이 꿈이길 바랐다. 꿈속에서 자주 보았던 죽음처럼 현실의 내가 죽고, 꿈에서 깨면 건강한 몸을 가진 내가 있었으면 했다. 그때는 격동의 사춘기를 겪느라 그녀의 말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해준 말을 비밀 일기장에 적었다. 무릎 위에 포갠 내 손을 잡던 그녀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고스란히 전해지던 그날의 온기를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어언 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야,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알았다. 어린 시선으로는 뒤틀린 사고를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불행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을. 그들의 어린 시선에 대응할 것 없이,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도록 노력하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보면 나의 문제는 늘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맬 때도 나의 방황은 정당한 것이라 여기며 당연하게 현실 속의 나를 미워했다. 남들과 다르게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이유로 스스로에게 함부로 굴면서도, 남이 날 그렇게 여기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내 모든 불행은 그들 때문이라고 믿었고 습관처럼 결핍을 타고난 몸을 원망했다. 실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육체로만 보았기 때문이었건만. 뒤틀린 생각에 골몰하느라 어른이 되어서도 오래도록 사춘기 태를 벗지 못했음을 알았다.
아마도 외할머니는 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잠에서 깨면 사라지고 말, 허상 말고 진짜를 꿈꾸라고. 날 때부터 불의의 사고처럼 생긴, 장애가 있는 육체를 나라고 인식한다면. 나는 그 시선 안에 갇혀 일평생 허상을 쫓게 될 테니 바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고 말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물려준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니 그 힘을 믿고 다시 보라고. 그러면 취하지 못한 채로 태어난 것이, 정녕 잃어버린 것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다른 것보다 먼저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라고 일러주신 듯했다. 뒤틀린 사고를 바로 하고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결핍도 장애도 없이 온전하게 빛나는 건강한 마음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외할머니는 이 생과 이별을 준비할 무렵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몸이 쇠하고 총기가 흐려져 엄마도 가끔 알아보는 정도였는데, 마지막 가시기 전 몇 개월간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고 했다. 정신을 놓은 상황에서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었고, 욕창 때문에 자세를 바꿔 누일 때 '아프다, 쫌!'이라고 말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당신 음력생일 이튿날 돌아가셨다. 볕이 좋았던 어느 오후, 점심을 먹고 엄마가 선물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듯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나는 외할머니의 음력 생일날 양수를 터뜨리며 7개월 만에 태어나, 나와의 음력 생일은 딱 하루 차이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나의 양력 생일 기준으로는 사흘, 음력 생일로는 하루가 지난 금요일 점심때였다.
가족들은 사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 살뜰히 챙기더니 본인 장례 날마저 주말 껴서 날 좋게 갔다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한결같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몹시도 각별했던 외할머니를 영영 못 만난다는 사실은 못내 슬펐지만, 예를 다하여 작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삼배를 올렸다. 꿈에서 숱하게 마주한 죽음보다 더 꿈같은 현실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내 꿈에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었다. 함께 이야기 나누던 그녀의 몸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음으로는 길이길이 추억할 듯하다. 내내 아프던 허상의 꿈은 후회 없이 꾸었고, 내 정체성이 육체에 있지 않음을 알았으니 바른 눈으로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육체가 아닌
지음 받은 그대로의 마음이므로.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