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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섬 Jun 18. 2023

각자의 세계를 구원하는 서로의 태도에 관하여

우리의 20세기 (감독 마이크 밀스, 2016)

좋은 영화는 관람자의 세계를 넓혀준다. 작년 여름에 본 단편영화 <사랑의 여름>(이성욱 감독, 2021)은 말로만 듣던 미국의 히피 문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탐구하던 영화 속 인물들을 디딤돌 삼아 대공황 시대와 베트남 전쟁을 거치던 격변의 미국을 들여다보았고, 불안한 사회 분위기가 야기하던 문화와 사상의 변천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20세기>는 그 시기를 지나온 한 사춘기 소년과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다. 대공황 세대인 1924년생 엄마 ‘도로시’와 1964년생 아들 ‘제이미’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벌어진 서로의 간극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메우려 하고, 도로시가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의 세입자 ‘애비’, ‘줄리’, ‘윌리엄’은 각자가 살아온 서로 다른 연대의 해결책으로 모자(母子)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아름답고 감각적인 화면 속에 다섯 인물의 성장을 직설적으로 그려내는 이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사랑의 여름>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만날 수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으리라.

돌이켜보면 내 세계를 넓혀준 첫 관문은 아무래도 역시 가족이다. 사람을 우주에 빗대어 말하자면, 탄생이라는 빅뱅 이후 우주의 부피가 점점 커질 수 있는 건 폭발에 의한 관성이 아니라 오롯이 가족의 힘 때문일 것이다. 다 자라고 나니 이제는 보인다. 나의 손재주는 아버지로부터, 식성은 할아버지로부터, 성격과 가치관은 어머니로부터 기인했다. 나의 세계를 끊임없이 염려해 준 사람들 덕분에 내 세계는 끝을 모르고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무지하다. 왜인지 아버지에게는 날이 서고 어머니에게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이유를 알고자 한 적은 없었고, 종종 불편한 대척점에 서 있는 날이 있을지라도 터놓고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서른이 지나는 시점부터는 내가 그들의 세계를 보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막 깨달은 시점에 <우리의 20세기>는 또 한 번 나의 세계를 넓혀주려 한다.



영화는 감독의 유년 시절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춘기의 절정에 이른 제이미는 이혼 후 홀로 자신을 양육하는 엄마에게 종종 갑갑함을 느낀다. 종종 외롭고 슬퍼 보이는 엄마가 자신에게는 속내를 비치지 않는 것도 답답하고, 자신을 언제나 통제 속에 두려는 것 역시 답답하기만 하다. 반면 도로시는 아들이 아빠 없는 환경에서 좋은 남자로 잘 자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속을 끓이며 전전긍긍한다. 결국 펑크 예술가이자 자궁경부암을 겪는 20대 세입자 애비, 제이미 또래의 동네 소녀 줄리, 세입자 중 유일한 남자 어른 윌리엄에게 각각 아들의 인생 공부를 부탁하지만 어쩐지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을수록 아들의 일탈은 잦아지기만 한다. 엄마의 의도와는 반대로 펑크 음악, 클럽, 음주, 약물, 또래 친구들의 미숙한 성적 경험과 페미니즘의 물결이 제이미 주변을 휘감고, ‘이해할 수 없음’과 ‘이해하지 않음’으로 요약되는 모자의 대치는 그들의 심리적 거리를 더 멀어지게만 한다. ‘애를 얼마나 사랑하든 그냥 계속 관계가 망가진다’고 털어놓던 도로시의 한마디가 내내 머릿속을 체하게 만든다.

작품을 통해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나’를 탐구하는 감독의 여정은 결코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사춘기의 제이미는 시종일관 ‘대공황 세대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엄마를 단정하지만, 훗날의 제이미는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고 귀결한다. 이는 제이미를 데리고 클럽에 갔던 애비에게 “넌 바깥세상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그 앨 본 거야. 난 평생 못 보겠지.”라던 도로시의 말과 맥을 같이 한다. 어쩌면 이 관계는 서로를 ‘알 수 없음’으로 귀결하게 되는 것이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로의 진심을 최대한 터놓는 것이 관계의 유일한 구원이 될 거란 메시지를 영화는 암시하며, 시종일관 밝고 화사하고 웃음기 띄는 분위기를 견지할 뿐이다.

<우리의 20세기>는 가족 영화이면서도 <20세기의 여자들>이라는 원제가 드러내듯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다룬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은 여성에 대한 논의조차 희박하던 그 시절, 서툴지만 주체적으로 살고자 했던 그들의 성장을 통해 여전히 서툰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안의 메시지를 가득 전해준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 있든 이 영화를 한 번은 꼭 만나보기를, 그럼으로써 각자의 세계를 더 넓히고 또 거꾸로 더듬어 보는 경험을 해보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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