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행복> 다섯 번째 이야기
내 인생에서 돈은 어떤 의미였을까? 돈이 내 행복에 영향을 미쳤을까? 돈의 유무를 통해 내 인생의 도표를 그려본다면 내 인생은 그야말로 T 익스프레스다. 업 다운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 높지 않은 업, 한 없이 떨어지는 다운. 떨어질때의 아찔함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진짜 롤러코스터 였다면 떨어질 때 스릴 넘치고, 아르네날린과 엔도르핀 덕택에 황홀감을 느꼈을 텐데, 실제 삶의 롤러코스터는 세르토닌과 멜라토닌 덕택에 우울감만 쌓였다. 게다가 이 거지같은 롤러코스터는 자동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내 인생의 롤러코스터, 가장 위의 정점에서 떨어질려 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나는 2002년 가을에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생활(生活)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기 위해서 행하는 필수적인 활동이라 사전에 적혀있다. 그 전까지의 내 삶은 생활이 아니었다. 강사 생활을 하기 전까지 나는 미래의 봉준호를 꿈꾸며 밤새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만들고, 돈이 필요할 때면 여기저기 영화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일당, 주급, 월급이라는 개념은 없었고, 조감독이 그때그때 (지 기분에 따라) 주는 데로 돈을 받았다. (지금은 영화 스텝들의 처우가 많이 좋아졌기를 바란다.) 대충 헤아려보면 300만 원 정도 되었다. 월급이 아니라 연봉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돈보다 값진 경험을 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영화판은 돈보다 화려했다. TV나 영화에서 나오는 유명 배우들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었고, 정우성과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운 좋은 날도 있었다. 전지현과 마주하며 밥도 먹을 수 있는 호강도 누렸다. 사소한 잡담이 주를 이뤘지만 영화에 관한 진지한 담론을 주고받을 때면, 역시 감독이 될 사람이라 생각이 남다르다며 인정받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2퍼센트 밖에 안 남은 내 마음의 배터리는 급속으로 완충되었다. 틈만 나면 아무 곳에서나 누워서 잠들고 치킨 한 마리 내 돈으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삶은 빈궁했지만 괜찮고 좋았다. 이 고생이 얼마 안 가 끝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감독이 되어서 하이얏트 호텔 스위트 룸에서 룸서비스로 오만 원짜리 치킨을 시켜 먹을 수 있을 거라 꿈을 꾸며 하루하루 버텼기 때문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대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란 말을 가슴에 되새겼다. 배고픈 돼지였지만 꿈으로 배불렀다.
곤궁하고 비루한 삶은 빚을 지게 했고, 빚을 갚아야 했다. 단편 영화 두어 편 찍으면서 부모님이 해주신 원룸 보증금은 이미 날려 먹었고, 만들 수 있는 카드는 모두 만들어 대출에 현금서비스까지 몽땅 영화에 털어 넣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투다리 화장실에 붙어있던 '돈이 필요하세요?'라는 명함을 보고 술김에 '네, 돈이 필요해요'라고 연락을 했더니, 닭똥집 꼬치구이 술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문신한 형님이 방문했다. 난 문신 형님이 내민 서류를 다 읽지도 않고 쿨하게 사인했고, 문신 형님은 내 손에 돈봉투를 쥐어 주고 쿨하게 떠났다. 쿨하게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만든 단편영화가 한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대학로 한 극장에 상영도 되었다. 이제 비상의 때가 온 듯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일 것만 같았다.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장편 시나리오는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져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못 버리겠다.) 존재하는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했다. 당선되지 않았다. 존재하는 모든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보냈다. 연락이 없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시나리오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어떠냐고 물어볼때 마다, 아 그거, 바빠서 못 읽어봤다는 말만 해댔다. 문신 형님은 눈치도 없이 계속 연락을 했다.
힘겨웠던 방황은, 계속되었다.
영화 하는 사람에게 영화 같은 일이 펼쳐졌다. 몇 번 일하느라, 아니 일하는 척하면서 전화를 못(안) 받았더니, 문신 형님은 직접 내가 살던 옥탑방까지 찾아오는 자상함을 보여줬다. 문신 형님의 첫 번째 질문이 시작됐다. '언제 갚을 거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신 형님에게 내가 쓴 시나리오를 두 손으로 공손히 제출했다. 형님은 '라면 있냐?'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지며, (끓여서 바치라고 눈으로 말했다.) 내 침대에 누워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계란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문신 형님은 '소질 있네'라고 칭찬해 주며 이번에는 엎드린 자세로 집중해서 시나리오를 읽는다. 계란이 들어간 라면을 형님 앞에 바쳤을 때, 문신 형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세 번째 질문을 했다. '갚을 생각은 있는 거지?' 나는 아무런 말없이 양반다리로 앉아 있다가, 지금은 무릎을 꿇어야 할 타이밍인가 고민하며 움찔거릴 때쯤, 네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밥 있냐?' 사놓은 햇반을 뎁혀 밥상 앞에 놓자, 김치가 맛있다며 고향이 어디냐고 다섯 번째로 물었고 난 전라도 광주라고 말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초기철학에 대한 신념이 바뀌는데 평생이 걸렸지만, 나의 신념은 10초만에 바꿨다. 학연, 지연, 혈연은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썩은 연줄이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문신 형님이 '나도 광준데'라고 말하는 순간 지연은 나에게 하늘이 내려준 튼튼한 동아줄이 되었다. 나는 숭의중, 고려고 출신이라며 신나면 안 되는 상황에 신나게 말했다. 문신 형님은 살레시오고를 나왔다고 말했다. 살레지오 고등학교는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천주교 재단의 전통 명문고이자 광주의 상징이며 광주의 자랑이 아니냐며 힘주어 문신 형님께 말했다. 문신 형님은 말없이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물을 한잔 마시며 호기롭고 깔끔하게 입을 헹구신 문신 형님은 나에게 여섯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담배 있냐?'
우리는 옥탑방 앞마당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오른손에 담배와 왼손에 믹스커피 한잔이라는 완벽한 조합으로 완벽한 호흡을 완성시켰다. 내 날숨과 들숨을 문신 형님에게 맞추면서, 내 빚진 삶을 최대한 구구절절하게 전했다. 생동감과 긴장감이 넘치는 구성과 약간의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나의 이야기에 문신 형님은 푹 빠져들, 었던 것처럼 보였다. 문신 형님은 다 먹은 종이컵에 담배를 비벼 끄며,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질문을 한꺼번에 나에게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어떻게 돈 갚을 거야?'
영화 하는 사람에게 영화 같은 일이 가끔은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그날 밤 문신 형님이 떠난 뒤, 나는 처량한 설거지를 했다. 왠지 모를 눈물이 나올랑 말랑 할 때쯤, 평택에 사는 친구 A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이 근무하는 학원에 영어 강사로 와 줄 수 있겠냐는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였다. 영어 강사라. A와 나는 한때 비비안 속옷 만드는 공장에 다니는 여직공들에게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무료로 가르치는 일을 함께 했었다. 우리가 잘 가르친 건지, 아님 그냥 대학생 오빠여서 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솔직히 내가 조금 더)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순수하게 선생이라는 직분에 충실하자 했다. 수업이 끝난 늦은 밤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으로 목구멍에 쌓여있던 분필가루를 씻어내며 서로 다짐했다. 절대로 한눈팔지 말고, 수업에만 충실하자고. 아무리 예뻐도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다'를 잊지 말자고. 1년 후에 A는 이른 나이에 예쁘장한 여직공 한 명과, 엄마를 닮으면 예쁠 뱃속 아이와 함께 셋이서 결혼을 했고, 나는 사회를 봤다.
A는 그날의 우리가 그립다고 했다. 함께 일했던 그날의 추억이 좋았기에 다시 한번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함께 애써보자고 했다. 물론 나도 그 시절이 좋았다. A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 학원의 입지조건, 주변 환경, 원장의 성격, 함께 일하는 강사들의 성향, 특이점, 학생들의 실력, 인성 등의 정보를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알고 싶었던, 월급이 얼마냐라는 질문을 했다. A는 기다렸다는 듯이 150만 원, 플러스알파라고 이야기했다. 현재 영화 알바하면서 받는 연봉의 반이 되는 돈이 월급으로 들어온단다. 문신 형님이 조만간 다시 보자며 쿨하게 내 곁을 떠난 지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마지못한 척하면서, 너 부탁이니까 들어준다는 말과 함께 A의 제의를 놓칠세라 얼른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신 형님의 아홉 번째 질문과 열 번째 질문이 내 귓가에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냐? 돈부터 갚아야 되지 않냐?'
더 늦은 그날 밤, 문신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돈을 벌겠다고. 앞으로 한 달에 얼마씩 갚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소주 몇 병을 마신 더 늦은 그날 새벽, 조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당분간 나 찾지 말라고. 돈 벌어야 한다고. 영화 안 할 거냐라고 조감독은 물었고,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돈 벌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이 꿈꾸는 삶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며.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가기 싫은 직장을 돈 때문에 가야 하는 비극은 미라클 모닝으로도 극복하기 힘들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사람에게 행복은 사치다. 앞서 말한 대로 소확행은 마취제일 뿐이다. 어묵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소주를 한없이 들이부어도 월요일의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영혼 없는 육신은 오로지 돈을 위해 지옥으로 향해야만 한다. 우울한 삶이다.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삶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중 대부분은 미리 빌려다 쓴 카드빚과 대출금 때문에, 더 심한 경우는 오늘 당장 먹고 살 걱정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 돈을 버는 이유는 행복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다. 생존 불안과 상대적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칸은 돈 버는 법과 우울함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서와 자기 계발서로 넘쳐난다. 한쪽에서 돈 벌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돈 못 벌어도 마음을 챙기면 괜찮다고 말하는 형세다. 또 어떤 책은 우리가 너무 돈만을 추구하며 산다고, 돈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가르치듯 말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당장 돈 때문에 쪼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죄다 부질없는 소리로 들린다. 겉만 그럴싸하고, 번지르한 예쁜 쓰레기 같은 말이다. 돈이야 벌면 되지 않냐고? 세상에 돈 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종자돈 만들어서 키워 나가면 된다고? 종자돈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지 않는다. 종자돈 모을려고 열심히 살지만 그게 잘 안 된다.
포트폴리오 투자 원칙은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닭장에서 열심히 닭을 키우고, 달걀을 수거하지만 달걀을 양껏 가질 수 없다. 달걀은 닭장을 소유한 자본가가 다 가져가고, 자본가는 겨우 달걀 한두 개 만을 우리 손에 쥐어준다. 일부 욕심많은 인간은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우리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달걀마저 뺏으러 든다. 우리는 달걀을 모을 수 없다. 당장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구니에 담을 여분의 달걀조차 없다. 달걀을 먹으면서 우리는 꿈꾼다. 나도 언젠가는 양계장을 소유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진다. 당장 비어있는 바구니를 보면서 말이다.
달걀을 나눠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달걀을 얻는다. 그것으로 그랜저를 벤츠로 바꾸고, 더 비싼 브랜드 아파트로 이사한다. 양계장을 무제한으로 가질 수 있게 허락한 자본주의는 자본가를 낳았고, 자본가는 여가용으로 람보르기니를 사고, 시그니엘에 산다. 난 아무리 처절하게 달걀을 모아도 이번 생에 시그니엘에 살 수 없음을 안다. 그렌저, 벤츠, 시그니엘. 안 보고 싶지만 안 볼 수 없는 세상이다. 비참할 정도로 불공평한 세상이다.
심리학은 달걀 없는 우리에게 마음을 챙기라 한다. 뇌과학은 호르몬을 다스리라 한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코르티솔 호르몬이 우리를 잠식하지 않게, 긍정적 마인드를 통해 오히려 스트레스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으라 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또 한 번 강조한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달걀 하나가 더 소중하다.
달걀을 충분히 나눠주면 안 되나. 적어도 핀란드는 달걀을 충분히 골고루 나눠주는 나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