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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 영 May 31. 2021

그녀가 내 섬에 들어오려할 때.

1교시 <행복> 일곱 번째 이야기


상실은 고통스럽다. 있었다가 없어진 것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은 번갈아 가면서, 때론 한꺼번에 덤벼와 사람을 괴롭힌다. 상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사랑은, 연애는 아무런 의미 없는 관념어일 뿐이다. 삶이 팍팍해서 당최 그런 것들이 끼어들 틈이란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한동안 내 삶을 지배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하나였고 강사 생활 2년 차였다. 돈에 쪼그라들고 술에 절어진 내 삶, 하필 그 타이밍에 그녀가 나타났다.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용기 내어 꺼내 보려 한다. 애써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으려 노력해 보겠다. 김 빠지는 소리겠지만, 미리 말해두자면 결말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한심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는 성장 이야기다. 그녀는 그냥 내 곁에 잠시 있다가 때가 돼서 자기 갈 길 떠났다. (그것도 아주 멀리.) 나도 그녀도,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훗날 깨달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은 했었어야 했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때는 몰랐고, 뒤늦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한 남자의 고백 이야기다.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았었다 해도 난 상관없다. 정말로 그렇다. 로맨스가 아니어서 미안하지만, 적어도 진부하진 않을 거다. 





그 당시 내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통해 얻었던 유일한 깨달음은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고통스럽고 너도 고통스러우니 서로 공감해 주며 그렇게 '그냥' 살아가자는 허망한 사실 말이다.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하지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볼 때마저도 마땅히 느껴져야 할 상대적 행복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이들과 내가 별다를 바 없는 처지라 생각될 정도로 이기적이었고, 그런 유사한 종류의 프로그램이 내 눈에 보일라 치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누군가 나에게 보이는 관심은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숨어 다니고 도망 다녔다. 나를 위로하지 마라. 차라리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라. 난 자격이 없는 놈이다. 쪼잔한 행동, 쪼잔한 말투, 참 쪼잔한 삶이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직장 내에서 아무도 나에게 사적인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 A가 예외였긴 했지만, A조차도 사적인 질문은 더 이상 나에게 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호수를 만들었고,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고, 그 섬에 들어가 혼자 살았다. 


B강사는 막 이사 와서 눈치 없는 이웃처럼, 혼자만의 섬에 틀여 박혀 살고 있어 모두가 말 걸지 않은 나에게 쇼펜하우어를 아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주위의 시선이 B강사와 나에게 모이고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B강사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쇼펜하우어의 <인생론>를 읽고 참 좋았다고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 책을 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B강사는 마치 삐져서 말하지 않는 아이를 다루 듯, 계속 착한 엄마 말투로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흉상을 자기 서재에 둘 정도로 칸트를 존경했단다. 칸트의 사상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던 쇼펜하우어에 비해 피히테, 셀링, 헤겔은 그들만의 의견을 추가시켜 칸트의 사상을 변형시켰단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그들 모두를 싫어했고, 그중에 헤겔을 제일 싫어해서 자기 개 이름을 헤겔로 짓고, '헤겔 개새끼'라고 불렀단다. (이 말하면서 수줍은 듯 양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계속 삐딱선을 탔다. 그래도 쇼펜하우어가 헤겔을 싫어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잠깐 생각을 하긴 했다. 책에서 언뜻 본 내용이 맞다면, 쇼펜하우어는 헤겔한테 경쟁에서 밀렸다. 질투도 났고 열등감도 느꼈겠지. 헤겔이 더 잘 나갔으니까. 내가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는 말했다. 


"저는 열등감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헤겔이랑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개설했는데, 헤겔 수업은 학생들로 가득 찼고, 쇼펜하우어는 학생이 별로 없었데요. 쇼펜하우어는 사이비라고 여겼던 헤겔이 그렇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한 달만에 사표를 냈고요."


나와 타인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보통은 공감대가 형성되며 서로에게 호감이 일기 시작한다. 난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는 '저도 똑같은 생각을 방금 했어요.'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껌이랑 술만 주야장천 씹어대고 마셔댔던 내 싹수없는 입은 (그것도 그녀에게 처음으로 한다는 소리가) 날 비호감으로 만들기 충분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죄송한데, 혹시 저 아세요? 말씀이 너무 많으시네요."


그녀는 '아...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나를 향했던 의자의 방향을 돌려 정면을 향해 바로 앉았다. 엿들었는지, 주변에 있던 몇몇 여선생님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니네가 뭔 상관이야. 정말 그랬다. 상관없었다. 난 계속 고통 속에 빠져 있어야 했고, 그러고 싶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녀는 양볼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뿐, 미소는 잃지 않았다. 당황함을 숨길 때 나타나는 억지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미묘한 미소였다. 어린 시절, 허벅지에 종기가 나서 병원에 갔었을 때, 흉측한 피고름을 자기 손으로 짜내면서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나에게 보여줬던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간호사 누나의 미소가 생각났다. 두 미소 모두 그 의미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모나리자의 미소였다.





퇴근하면서, 서랍을 열어 쇼펜하우어의 책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자마자 책을 꺼내어 책장에 꽂았다. 끝까지 읽고 싶은 생각도 잠시 들어 망설였지만, B강사와 있었던 일이 떠올라 더 힘차고 깊숙하게 꽂았다. 소주 한 병을 글라스에 따라 원샷하다시피 마셨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쇼펜하우어 생각이 계속 났다. 헤겔을 그렇게 미워했다고? 누군가를 끔찍이도 증오하며 열등감에 시달린 삶이 행복했을 리는 없다. 오랜만에 책을 읽다 새벽을 맞이했고, 오랜만에 책에 밑줄을 쳐가며 필사까지 했다. 책을 덮은 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두 문장으로 정리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 (현재에 충실하라)


결국 쇼펜하우어도 고대 그리스 철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 해서 외면하거나 인생을 스스로 방치하며 살아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인지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가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가 내 앞에 나타나 날 야단친다. 도대체 넌 지금 무슨 삶을 살고 있는 거니? 힘들다고 유세 떠는 거니? 너만 힘드니? 꿈을 포기해 낙심한 사람이 너뿐이니? 돈이 없어 힘든 사람이 너뿐이니? 지난 2년간의 허송세월이 부끄럽지도 않니? 상실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니? 난 쇼펜하우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꾸중을 듣고 있었다. 새벽이 걷히고, 햇빛이 점점 더 명확해지는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편히 누었고,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쇼펜하우어가 있었고, 머지않아 그 위로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야'라고 혼잣말하고 잠을 청했다. 

We honor what we have lost as well when we learn from our loss, take it into who we are, and move on. 
[2011년 9월 고1 전국 연합 모의고사 35번]

우리가 상실을 통해서 배우고, 그것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여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상실한 것마저 존중하게 된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었고, 당신 덕분에 내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언젠가 한 번쯤은 돌아봐 주실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팀의 <사랑합니다> BGM도 흘러나오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한때 영화를 했던 사람에게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 (실제 삶에서 벌어진다면 완전히 낯 간지러운, 그런) 개막장 스토리다.  


그녀 덕분에 내 삶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다음 날, 그리고 그 그다음 날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로또 맞아서 돈 걱정을 안 하게 되지도 않았고, 문신 형님한테도 계속 전화가 왔다. 삶은 그렇다. 한 순간에 바뀌면 삶이 아니라 영화다. 그녀와 나는 다른 강사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일에 관계된 필요한 말만 나누는 그런 사이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 영화를 공부했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하고 영어강사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 가끔은 영화보다 더 슬픈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햇반과 신 김치와 진미채로 삼위일체를 이룬 저녁식단에 삼이라는 수를 더해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어 소주 세 병을 마시고 잠을 청한 어느 날, 슬프고 짠한 일이 드디어 벌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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