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한국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 안이 가결된 이후,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다. (고시원 고추 노출 기절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어느덧 나는 그녀에게 말을 어렵지 않게 걸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적인 이야기까지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내 책상에 쇼펜하우어의 글이 여전히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화 내용은 주로 수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해설집을 봐도 이해가 안 가는 내용, 이해는 완벽히 되었지만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은 질문들을 일부러 준비해 놓았다가, 둘 다 수업이 없는 한갓진 시간을 활용하여 그녀에게 물어봤다. 그때마다 그녀는 성심성의껏 나에게 알려주려 노력했다. 대답 끝에 늘 이것은 단지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하는 겸손함도 잃지 않았었다. 난 대답보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대화가 끝날 때 나는 미리 준비해 놓은 레쓰비를 그녀 책상에 올려놓았다. 잘 가르쳐준 대가로 지불한 것이어서 부담 느끼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도, 그녀가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니 한편으로 서운해지는 애매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내가 사준 레쓰비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부담이란 단어의 의미부터 짚어 봐야 한다. 부담은 어떠한 의무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사전에 쓰여 있다. 요전 날, 개구리 팀장이 나에게 술을 사준다고 했다. 나는 부담이 돼서 아무 탈도 없는 애꿎은 배에 탈이 났다고 거짓말하며 싫은 티 안 나게 거절했다. 개구리 팀장에게 술을 얻어먹게 되면 나는 팀장의 요구에 적어도 한 번쯤은 부응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그보다 술자리에서 그의 온갖 수발을 다 들며, 그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한다는 사실은 벌써부터 내 비위 먼저 상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주꾸미 안주가 기가 막힌 곳이 있다는 말에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개구리와 함께 술자리를 갖는 것은 부담스럽기 짝이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에 ‘부담된다’는 ‘싫다’와 동의어로 쓰인다. 어떤 사람의 부탁과 제안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그 사람이 편하지 않거나 싫어서다. 그녀가 내가 준 레쓰비를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가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반면에 그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말한 것에 내가 서운함을 느꼈던 것은 왜일까? 이성으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의 가치를 떠나 준 사람의 의도를 헤아리게 된다. 만약 그녀가 부담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내 마음이 훨씬 편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은 내가 준 레쓰비를 훗날 커플링 반지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구애의 선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잠재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즉, 옆 자리의 직장 동료가 준 이 레쓰비는 훗날 키스, 혹은 키스보다 더한 행동의 허락을 나타내는 일종의 암시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어떠한 부담도 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요컨대 내 레쓰비는 오백 원짜리 깡통 커피고, 게다가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그 가정에 섭섭함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난 그녀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냥 이기적인 짝사랑만 하고 싶었다. 육체와 정신이 가난한 나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나를 아예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니 예상치 못했던 서글픔이 밀려왔다. 양가감정은 이래서 늘 혼돈과 두통을 가져온다. 서랍에 들어있는 빨간 타이레놀 한 알과 파란 펜잘 한 알을 같이 먹어야 나아질 일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 전체를 보면 하나의 비극이고, 삶을 낱낱이 들여다보면 희극’이라 했다. 둘 중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인생은 희극이기도 하고 비극이기도 하다. 문신 형님에게 매달 돈을 갚아야 하는 인생은 비극이다.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비극이다. 하지만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와 함께 일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희극이다. 그녀와의 대화를 좋아하는 것은 희극이고, 감히 그녀를 사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 쇼펜하우어 둘 다 틀렸고, 둘 다 맞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든, 가까이선 보든 시기가 길건, 짧건 항상 희비가 교차한다. 인생은 매번 우리를 희비극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빨간 약을 먹을지, 파란 약을 먹을지. 이 선택은 영화처럼 단 한 번의 복용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신 형님과 개구리 팀장과 그녀가 함께 존재하는 곳이 세상이다. 좋아하지만 사랑하면 안 되는 세상이다. 울다가 웃을 수도 있고, 웃다가 울 수도 있으며, 웃으면서 슬퍼할 수도 있고, 슬프지만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인생이다. 빨간약과 파란 약을 번갈아 먹고, 때론 같이 복용해야 하는 곳이 세상이고, 인생이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모피어스, 영화 <메트릭스 (1999)>
빨간 두통약과 파란 두통약을 몇 통 더 사다 둬야 할 일이 학원에 생겼다. 원장과 개구리 팀장은 학원 모든 강의실과 교무실에 CCTV를 설치했다. CCTV를 설치해도 되냐는 동의를 학생, 학부모, 강사들에게 받은 것도 아닌 일방적 결정이었고, 일방적 결정만큼이나 빠르게 설치되었다. 쉬는 시간 학생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CCTV를 통해 학생들을 보다 안전하게 관리하겠다는 의도와 간혹 일어나는 도난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취지는 분명 설득력이 있긴 했지만 수업에 모든 부분, 심지어 교무실에 있는 모습조차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가워할 강사와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덧 교무실은 CCTV의 정당성을 두고 철학적 논쟁이 오가는 아수라장의 아고라가 되고 말았다. 철학은 Yes와 No의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는 곳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철학적 논쟁은 비록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CCTV 설치에 대한 논쟁만 놓고 보더라도, CCTV가 가져다주는 장점과 단점을 살펴봄으로써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나름 현명한 결과를 철학적 사고를 통해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들은 강사들이 단점으로 생각해 염려한 부분을 오히려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장과 개구리 팀장은 빅 브라더스(Big brothers)가 되었다. 빅 브라더스는 과학이 가져다준 값싸고 효율적인 감시 장치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학원이 차질 없이 운영되어 더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듯 보였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CCTV를 바라봤고, 주 업무가 그것으로 바뀐 듯했다. 회의 시 강사 중 한 명을 특정해서 수업이 너무 루즈하게 진행된다, 졸거나 잡담하는 애들 관리에 소홀하다는 식으로 그들은 강사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CCTV 설치에 대한 비난이 잦아들지 않자, 빅 브라더스는 일부 힘 있는 강사들을 원장실, 즉 공포의 101호실로 불렀다. 힘 있는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강사들이고, 따라서 학원 매출과 직결되는 강사들을 의미했다. 빅 브라더스는 그들에게 더 많은 월급과 혜택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힘없는 강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힘 있는 강사들에게는 은혜의 방이 바로 101호실, 원장실이었다.
개구리 팀장은 회의 중 또 나를 지목했다. 수업할 때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수업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라고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내 수업을 CCTV로 지켜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학생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그것을 지적받게 되어 억울함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당시 난 2003년 외국어 영역 수능 기출문제를 학생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45. 다음 글의 요지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2003년 수능]
In many countries around the world, narrow- mindedness, religious impatience, greed, and fear have turned into crises that have taken the lives of millions. Many struggles such as rich versus poor are fought under deeply held beliefs. But given the destructive results, do these beliefs make sense? How often, in fact, do we stop to think about what we believe? One of the major problems we face both as individuals and as a society is simplistic thinking-or the failure to think at all. It isn’t just a problem; perhaps, it is the problem.
① 종교적 신념은 국경을 초월한다.
② 국제 분쟁이 해소되고 있다.
③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④ 빈부의 차이는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
⑤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많은 학생들이 정답을 고르지 못한 문제였다. 위 지문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편향된 마음, 종교적인 불관용, 탐욕, 두려움에 이끌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들을 저질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 등의 온갖 투쟁들은 그 나라 안에 깊이 새겨진 신념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파괴적인 결과들을 놓고 봤을 때, 그러한 신념들은 이해 가능한 것들인가?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념에 대해 얼마나 자주 깊게 생각해 봤는가? 개인이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너무 단순화된 사고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생각 자체를 너무 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풀어야 할 많은 문제 중에 하나가 아닌, 아마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수업 도중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은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째는 or the failure to think at all의 해석이었다. ‘or’는 ‘혹은’, 이라는 선택의 의미를 갖는데 의미가 이것 하나뿐이라고 알고 있는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or’는 ‘즉 다시 말해서’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또한 ‘failure’도 ‘실패’라는 의미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동사 ‘fail’은 ‘실패하다’라는 의미 외에 ‘하지 않는다, 실행하지 않는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명사 ‘failure’는 ‘실패’라는 의미와 ‘불이행, 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이 표현의 올바른 해석은 ‘혹은 생각의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즉 다시 말해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올바르다.
두 번째는 It isn’t just a problem; perhaps, it is the problem. 문장이었다. 학생들은 이 문장을 ‘그것은 단지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그 문제였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한 한국말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다. 여기서는 관사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줘야 했다. a, an과 같은 부정관사는 가끔 ‘단 하나’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려줘야 해석의 참뜻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정관사 ‘the’는 단순히 앞에 나온 명사를 반복해서 쓸 때 앞에 붙여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유일한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붙일 수 있는 관사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하나밖에 없는 해와 달은 영어로 쓸 때 항상 ‘the Sun, the Moon’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는 위의 경우처럼 유일한 대상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기보다는, problem이라는 명사를 강조하기 위해 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로 ‘그것(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은 단순히 수많은 문제 중에 하나가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사실 후반부 두 문장만 정확하게 해석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다.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에 대해 편협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할 뿐, 그것에 대해 진지한 ‘사고(思考)’를 등한시하거나 아예 사고 자체를 하지 않는 성향을 비판하는 글이기에 정답은 ③번이다.
개구리 팀장에게 지적받은 부분은 이 설명이 끝나고 난 다음부터였다. 나는 이 문제를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나서, 그녀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위험성에 대해 나에게 알려줬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취하는 성향을 말하며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는 신경을 끄고 외면하게 됨으로써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고 그녀가 힘주어 말한 내용을 나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 또한 한 치의 틀림없이 (마치 내가 생각한 것처럼) 학생들에게 전했다.
“나도 요즘 쇼펜하우어 책만 읽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그녀가 한 말에 뼈가 있음을 깨달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쇼펜하우어가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했다. 한 동안 신나게 떠들다가 종이 울렸고 수업은 이 한 문제로 시작과 끝을 맺었다.
개구리 팀장은 문제풀이와 관련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로 한 시간을 다 소모했다는 것을 비난했다.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난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학생들의 눈은 결코 지루하거나 수업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비난의 화살을 쏘는, 그런 눈빛은 (있긴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 팀장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나에게 물었고, 나는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했다며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과 나의 눈도 짧게 마주쳤다. 그딴 이야기를 왜 했냐고 팀장이 언성을 높였고, 나는 ‘학생들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본 채, 팀장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의지를 내뿜기 시작했다. 나는 눈으로 그녀에게 제발 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고,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내 눈빛을 이해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팀장은 혀를 몇 번 끌끌 차며 회의를 이만 끝내겠다고 말했고, 나에게 원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일어서면서 그녀를 바라봤다. 입을 앙 다문 채, 씩씩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원장실로 끌려가는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원장실에는 전에 없었던 분재와 난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위에 CCTV 모니터가 벽에 매달려 있었다. 원장은 작은 집게를 들고 분재를 융숭하게 다듬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후, 팀장은 어울리지 않은 다정한 말투로, 아까 큰소리친 것은 나를 좋아해서라고 말했다. 앞으로 수업도 상담도 훨씬 더 잘할 사람이라며,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지시한 대로 잘 따르면 앞으로 강사로서 성공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원장은 ‘그렇지’라고 맞장구치면서도 분재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1984>에 등장하는 공포의 101호실과 다를 바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협박과 고문이 아닌, 회유와 사탕발림으로 사상범들을 세뇌시켜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곳이 101호실이고, 원장실도 똑같았다. 분재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나무를 다듬어 만족을 얻는 활동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모양으로 가지가 뻗치려고 하면 집게를 통해 구부려 방향을 바꾼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판단되면 과감하게 가지를 잘라내기도 한다. 비록 좁은 화분에 갇힌 나무라 할지라도 의지와 자유가 있을 텐데, 이는 철저히 무시된다. 빅 브라더스는 나를 분재로 만들고 싶어 했고, <1984>의 윈스턴으로 만들려 했다. 나는 분재도, 윈스턴도 될 수 없었다. 영화감독의 꿈은 사라졌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 보고 읽었던 많은 영화와 책은 아직 내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와 책이 준 교훈은 인간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눈치를 갖게 해 주었다. 빠르고 정확한 눈치는 모호한 세상에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었다. 나는 내 눈치도 봐야 했다. 지나간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서 다시 새 인생을 시작해보자 미소 지으며 파이팅을 외쳐버린다면 그것은 나한테 너무 눈치 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지난날 감독을 꿈꾸며 열심히 살았던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눈치 있는 사람은 눈치 없는 척도 할 줄 안다. 한 동안 이 생태계의 부조리함을 못 본 척 살았었다. 최상위 포식자는 진화를 거듭해, 급기야 빅 브라더스가 되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4>의 윈스턴은 세뇌당한 후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다. 2004의 나는 빅 브라더스를 사랑한 척했다. ‘수업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자제하고 수업에 충실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원장실을 나왔다.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죄책감이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 수업은 옳았다. 확증편향은 학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내용이라는 신념은 옳았고, 앞으로 학생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이나 철학적 내용이 나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당당하게 학생들에게 시간을 할애하여 설명할 것이라는 더욱 강화된 신념도 생겼다. 신념은 자존감을 향상 시키는 중요한 뗄감이다. 거의 꺼져갔던 자존감은 이제 다시 불씨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원장실에서 나와 교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요전에 내가 그녀를 쳐다본 눈빛으로 내 홍채를 관찰했다. 나도 그녀의 홍채를 바라봤다. 나와 그녀의 홍채는 서로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