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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 영 Nov 09. 2021

껍질

소설 <껍질> (1)

 들어가기 싫다. 하지만 들어가야 한다. 문 앞에서 애꿎은 담배만 다섯 개비 째다. 00 화재 간판이 보인다. 왜 보험회사인데 화재라는 이름이 붙을까? 화재에 대한 보상에 전문일까. 그러고 보니 옆 건물의 보험회사 이름도 '해상'으로 끝나네. 한 회사는 바다를 전문으로, 그리고 지금 내가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이 회사는 '불'을 전문으로 다루나 보다. 혼자 킬킬 거리며 담뱃불을 다시 댕겼다. M형님에게 전화가 왔다. 


도착했니? 부담 느끼지 말고 교육 잘 받아봐. 


네 형님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M형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 사정을 다 알고 자기 사무실로 나를 호출할 때까지 나는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M형님은 전국 1등을 기록한 적이 있는 나름 이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같은 골프 동호회에서 만나 골프를 같이 칠 때까지만 해도, 즉 나름 내 사업이 잘 되었을 때만 해도, M형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서로 지지 않기 위해 필드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사실 M형님과 나는 동호회 내에서 1,2등을 다툴 만큼 라이벌 관계였다. 우리는 서로를 견제했지만,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고 그러다 보니 말도 섞고, 술잔도 섞고, 결국 친해지고 말았다. 


 사업이 망하고, 집이 경매에 들어가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이혼을 하고. 그렇게 2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2년 동안 골프를 간간히 치긴 했다. 내 사정을 아는 지인들이 가지 않겠다는 나를 한사코 불러내 위로 라운드를 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고집을 이길 수 없어서 나가긴 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공짜 라운드라고 기분 좋아서 헤헤거리고 이렇게 저에게 성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할 성격도 못돼서 표정으로 다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그들은 나를 다시 불러내지 않았다. M형님은 나를 골프장이 아닌 쪽갈비 집으로 불렀다. 한 동안 말없이 소금구이 쪽갈비 두 대와, 매운 양념 쪽갈비 한 대를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먹은 후, 그때서야 M형님은 보험일을 해보라고 나에게 제안했다. 


 코웃음을 쳤다. 보험이라. 그거 다단계와 비슷한 거 아닌가. 듣자 하니 신입 뽑아다가 단물 쓴 물 다 빨아먹고 결국 직원을 내팽개치는 걸로 유명하던데. M형님이 하얀 봉투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2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요즘 힘들지. 일단 생활비로 써라. 돈이 필요했는데, 돈을 받았고, 갚지 않아도 된다 하니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형님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의일까. 아님 내가 보험일을 하면 형님에게 어떤 이익이 되나.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은 바로 다음 달의 생계 걱정 때문에 바로 잊혔다. 해야지. 뭐라도 해야지. 내가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땐가. 


 딸을 만나러 가는 날, 적어도 밥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고, 용돈도 5만 원 정도는 줄 수 있어야 아빠 아닌가?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거라 착각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라고 생각했었다. 다행히도 전처의 벌이가 많이 좋아져서 딸의 생계 걱정도 한시름 놨었다. 내 한 몸만 잘 건사하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 번 해 볼게요 형님. 


그래서 지금 난 보험회사 건물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엘리베이터가 두 대나 있는데도 느리다. 아까 6층이었는데, 아직도 4층이다. 9시 55분. 이왕 올라갈 생각을 하고 나니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 때문에 첫날부터 늦을까 봐 속에서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띄는 순간 내 뒤에 온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 엘리베이터를 채웠다. 내가 타면 만원? 한 발만 더 들어가면 탈 수 있었지만, 나는 공중에 떠 있던 왼발을 조심스레 후진시켰다. 옆에 꺼 타자. 58분. 늦으면 또 어때. 어차피 며칠 해보고 그만 둘지도 모르는데. 옆 엘리베이터는 더 느려 터졌다. 늦어도 그만이라는 배짱과 늦으면 안 된다는 어떤 강박이 서로 심하게 다퉜지만, 나는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6층에 한 여성분이 반갑게 인사했다.


성함이? 

황 영입니다. 

아, M 대표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여기에 이름 적으시고, 체온 체크하신 후 체온도 적으시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대충 훑어보니 10명은 넘어 보인다. 본능적으로 맨 뒤 기둥 옆 자리로 갈려는 순간, 아까 그 여성분이 나를 붙잡고 맨 앞자리로 유인했다. 


앞자리가 좋습니다. 


차마 뿌리 치지 못해 결국 맨 앞자리에 앉고 말았다. 빨리 올걸. 맨 뒷자리를 보니 둥글둥글하게 생긴 한 남자분이 앉아 있었다. 아까 탈려고 했던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던 남자였다. 머리가 벗겨져서 잔상이 오래 남았다. 담배 여섯 대와 왼발의 일보 후퇴가 불러온 나비효과. 받아들일 수밖에.


아까 나를 안내한 여성분은 자신을 K코치라고 소개했고, 2주 후 설계사 시험 합격을 위해 오늘부터, 즉 여기에 온 첫날, 첫 시간부터 공부를 하는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놀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몰랐다. 하긴 묻지도 않았다. 3주의 교육기간 동안 무엇을 하는지. 설계사 시험이라. 언젠가 언뜻 들은 바로는 운전면허 시험 정도의 난이도라고 한 것 같은데. 나는 당황했다. 설계사 시험을 봐야 한다는 사실, 그것도 합격을 해야 한다는 사실, 합격을 하면 정식 설계사로 일을 시작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업이 진행됐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창밖의 풍경이 희미해지고, 대신 내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는 도대체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나는 당황했고, 집중을 할까말까 고민만 했다.


12시가 되자, K코치는 도시락을 나눠 주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단체로 식당을 가는 것이 금지되어서, 부득이하게 도시락을 드립니다. 양해 부탁해요. 


 밥도 주네. 제육볶음. 밥 양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밥도 주니 좋았다. 커피도 주었다. 매번 각 지역 지점장들이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을 듣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사주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 소속이지. 평택, 안중, 안성, 송탄, 나는... 노블레스. 노블레스? Noblesse의 의미는 귀족, 혹은 귀족사회에 해당하는 상류층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다. 뭔가 특별해 보이는데 너무 거창해서 민망하다. 평택, 안중, 안성, 송탄, 노블레스. 지역이 아닌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지점. M형님이 노블레스 소속이었구나. 차라리 나도 평택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각 지역에서 두 세명 씩 와서 서로 이야기도 하고 웃고 그러는데, 나는 나 혼자 뿐이어서 더 특별했고, 앞자리였고, 그래서 더 민망하고 뻘쭘했다. 


보험금이랑 보험료는 어떻게 다른거지? 내내 그것만 생각했다. 4시에 수업이 끝났다. 누구보다도 빨리 자리를 박차고 가는 나를, K코치가 또 가로 막았다. K코치는 꼭! 내일 다시 보자고 미소를 지으며, 내 손에 상자 하나를 쥐어주었다. 도마세트였다. 이걸 어디다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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