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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문철 Aug 15. 2023

신앙은 현실적이고, 현실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다.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1. Gottes Sein ist in der Geschichte, deshalb ist die Geschichte die Selbstoffenbarung  Gottes. Was ist der Glaube und die Wirklichkeit? Sie sind in unserem Leben. Der Glaube ist sehr realistisch und die Wirklichkeit ist der Bereich, in dem der Gott wirkt.

- 하나님의 존재는 역사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그렇다면 신앙과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우리의 삶 안에 있다. 따라서 신앙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현실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다 -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은 굉장히 방대하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꾸준하게 공부하고 읽어가는 이유는 그가 주는 신학적 깨달음이 매우 현실적이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신앙으로 비롯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들은적이 있다.

성경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가? 특히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인의 하나님이 되는가 하는 질문이였다.


만약에 기독교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종교를 넘어서 보편성을 가진다면, 앞서 나왔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마찬가지로 판넨베르크도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해서 고찰하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필연적인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현실에 관한 새로운 관점으로 부터 비롯된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기본적으로 파악하는 현실은 순간적이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와 동시에 우리가 파악하는 한국적 특색의 현실은 어쩌면 굉장히, 지극히 자본주의적 개념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낭만이 없는 삶을 의미하고 사랑과 행복, 기타 등등 다양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우리에게 아무런 실용적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사용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화폐중심적인 개념이 유일하게 삶에 대한 실용성을 담지하기 때문에 자본의 흐름만이 유일한 현실로 인지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물론 앞서 말한 현실이해는 지극히 필자의 주관적인 내용이지만, 현실을 성서를 통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 지점은 현실이라는 것이 각 개인이 느끼는 순간적인 태도나 시간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의미를 파악할 때 가능하다.


성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인간과 접촉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대과 시간, 순간적인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전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로부터 비롯된 현실이해는 역사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이해로부터 현실을 전체로서의 현실로 이해할 때, 전체로서의 현실은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 판넨베르트, "신앙과 현실" 중에서 -


인간의 역사가 순간적이고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없었던 역사적 기준이 생긴다고 한다면, 성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새로운 사건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일하고 계심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관점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으로서 역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결국 성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현실은 오늘날에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시던 하나님의 현현은 오늘날에도 동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역사하셨던 분과 동일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동일성 때문에 모든 새로운 사건에 대한 성서의 전승들에 따르면 새로운 사건의 빛은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지금까지의 사건을 다시 조명한다. 새로움의 출현과 더불어 여전히 과거의 것을 붙잡는 것을 성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라 부른다.
-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중에서 -


이 말에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동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성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사건의 연속성에 관한 것이다. 성서의 사건은 매번 새로운 것으로 드러날 수 있으나,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 나누었던 근본적인 질문,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왜 나의 하나님, 특히 한국인의 하나님이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성서를 통한 현실이해로 말미암아 그들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 놓여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믿음에 의해서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냐 라고 재차 물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동일성이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계시이해 즉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계시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실은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 주체자가 보는 순간적인 관점이나 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역사가 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가 현실이라면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하나의 코스모스적 현실이해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다시 인간의 관점으로 돌아오면 어떨까? 분명 앞서 말한 것처럼 세계를 언제나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면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활동을 시간에 제약하지 않고 또는 과거의 것으로만 두지않고 더 나아가 묵시종말적인 이해로만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활동영역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세계개방성"이라 이해한다.


성서적 사유에서는 우연적 사건과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미래라는 두 요소가 전혀 무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전능하심의 본래적인 활동영역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이제 미래를 등지고 살아가지 않으며, 새로운 것 곧 미래로부터 그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 있다. 근대 인간학은 이것을 인간의 '세계 개방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역사로서의 현실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교 사유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중에서 -




2. Wie kann der Gott sich uns offenbaren? Wie können wir zwischen der Selbstoffenbarung und der Erfahrung der Religion. Die Offenbarung Gottes ist in der Geschichte von Jesus, deshalb können wir nur durch Jesus den Gott erkennen. Die Selbstoffenbarung führen zu der Wesenerschließung.

- 신은 어떻게 우리에게 계시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종교적 경험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구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의 역사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하나나님의 자기계시는 하나님의 본질해명으로 이끈다. -


교회를 다니면 누구나 한번정도 꼭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적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쉽게 하는 질문 치고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을 곤란한 적이 많이 있을 것이다.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의 인식한계로 인하여 우리는 오감과 이성을 제외하고서 어느것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시느냐 하는 질문은 필연적이다.


오늘날에 하나님 이해는 기본적으로 소극적이다. 루터 이후에 하나님은 자연적 계시에 의해서도 인식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통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숨어계신다. 숨어계신다는 말은 과학적 방법론처럼 우리가 보고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다가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평상시에 숨어있다면,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사건들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종교적 경험들이 비일상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낳게 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지점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계시를 단순히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넘어서 그것은 자기에 대한 본질해명이라 말하는 점이다.


곧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계시란 본질해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성의 현현이 그 자체로 본질해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중에서 -


그런 점에서 언젠가 이야기 했던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결국 종교경험은 내면의 의식이라 결론을 내렸다는 말에 대해서 판넨베르크로 대답을 하고자 했었다. 그 지점을 다시 떠올려 본다면 종교적 경험은 인간학적 본질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면적 의식과 종교적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을 신앙의 내용으로 채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인 본질을 찾고자 한다. 그 이유는 종교의 근본적인 형태가 인간학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학적 본질은 인간의 내면과 실존으로 들어가지만 신학적 본질은 인간의 세계개방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다양성은 신적 존재의 현현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다양하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순간은 언제나 묵시종말적이기 때문이다.


그말은 세계의 종말의 시대가 오고 하나님은 그제서야 자신의 현현을 완성하신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많은 종교적으로 드러나는 신적 본질은 언제나 종교적 현현으로는 설명할 수 있으나 하나님 자신의 본질 해명에 가까운 계시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구약성서적 기대에서만 성서적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역사 종말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미리 성취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여전히 가려져있다. 왜냐하면 인간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활동하신다과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나의 삶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개방되어 있음과 동시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미래가 여전히 개방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가려져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종말은 모든 사람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각자의 삶의 종말뿐 아니라 모든 세계사건의 종말도 그렇다. 하지만 종말은 나사렛 예수 에게서, 물론 그의 제자들에게 알려진 죽은자들로부터의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일어났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바빌론 포로기 이래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모든 사건들의 종말이다.
-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중에서 -


하나님이 예수사건을 통해서 자가 자신을 드러내심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해 사람들이 질문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성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저 사람은 누구이길래 모든 것을 행하는가"하는 질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에 관한 관심과 통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 충만한 의미로 계시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쩌면 쉬운 말로 스포일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 역사의 종말은 드러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본질해명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는 옳았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만이 아니라 이로 인해 그의 운명과 행동도 한 분 하나님의 신성의 유일한 계시이다. 원래 자기계시라는 개념 자체는 그것이 이미 본래적으로 다양한 형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 안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 판넨베르크, "신앙과 현실" 중에서 -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미래는 성취된다. 즉 앞서 나타나야할 사건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잠정적이거나 또는 단순히 종교적 현현으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3. Wir können keine Geschichte erkennen, ohne Gott zu sein.

-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없이 역사를 인식할 수 없다. -


계시는 과거의 사건이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예수는 2천년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새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인식은 현재의 사건이다.

오늘날 예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과거, 예수가 살아있을 적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더 나아가 미래를 이어주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계시의 과거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더 나아가 미래에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된다.


그렇다면 역사와 계시는 대립하는가?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역사가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장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세계 안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한, 그분은 세계 안에 계신다. 역사는 창조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 없인은 전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 판넨베르트, "신앙과 현실" 중에서 -


따라서 역사는 보편사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전체를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임의적 사건에서 동일하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종말로부터만 그렇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현재를 살아가며 그 현재는 역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인하여 역사는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살아가는 개인주의적 사유가 이와는 어쩌면 맞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결코 전체주의적 사유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교회가 공동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미래를 의미한다. 미래에 관한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확정적인 삶에 관한 불안 속에서 하나님의 본질해명은 인간에게 신앙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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