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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하 Jun 28. 2021

인터뷰의 사적인 쓸모

<깨끗한 존경>, 이슬아


일을 하면서 클라이언트와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쌓인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군상에 대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화라고나 할까.


‘200살까지도 좋다는 상무님의 해피 BGM’

‘대리는 그렇게 과장이 된다’

‘그를 만나고 늘 바쁘다는 사람의 말은 믿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모르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너무 개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들은 특정 세대와 라이프스타일, 가치관을 대표하는 면이 있다.

생각해보니 결국 내가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로 남긴다는 것은 세상을 받아들이는데 '덜컹덜컹' 걸리는  많은 한 사람이 다른이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만약 이해가  어렵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와의 위치 관계 정도는 알고 있겠다는 마음에서 시작 된 셈이다.


이슬아 작가가 쓴 인터뷰집을 고른 이유는 몇 장 읽다 내려놓은 그녀의 책 <심신 단련>을 잊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그녀의 글이 (좋은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던 것 같다. 90년대 , 그리고 자신만의 유니버스(유료 뉴스레터, 일간 에세이, 가족 출판사 ) 가진 그녀에 대한 호기심.




서문에서 그녀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시작했고 ‘스스로에게 갇히는 날이 또 온다면 이 대화들을 다시 떠올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과연 이것이 나 밖으로의 확장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믿는 바를, 타인의 삶을 증거 삼아 더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터뷰이를 향한 애정과 편애는 좋은 인터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타인과 이야기 나눈다는 것만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할 수 있을까?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것과 타인에 대해 '나의 시선으로'이야기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은유 작가는 <다가오는 말들>에서 수영을 배우며 “그간 내가 얼마나 동질 집단에서 안전하게, 혹은 오만하게 살았는지 실감했고 남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다(183쪽)”고 말한다. 여기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이슬아 작가는 동질 집단 안에서 자신을 더 공고히 할 대상을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밖으로 시선을 이동하는 것, 전체 안에서 나의 위치를 알고 또 타인의 위치를 가늠하며 시야를 넓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향 역시 이 책에서 발견했다. 김원영 변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낸 두 권의 책에 대해 이슬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너무 불쌍히 여기지 않은 채로,
나에게 너무 도취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 서사를 힘차게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객관화를 해나가는 태도. 타인에 반응하며 잠재된 상호작용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것이 사회 안에 존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머무를 때와 도망칠 때를 아는 김한민


김한민 작가는 자신과 한국 사회를 '부적응과 저항'의 관계로 정의했다. 다양한 국가에서 생활한 경험이 그 차이를 더 선명하게 해서인지 그는 한국 특유의 (이상한) 점들을 잘 짚어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를 적응이 너무 안 되는 사람인 것 같다(87) 말한다. 예를 들어 책을 낼 때마다 그림체가 달라지고, 일을 할 때도 해도 해도 발전이 없다고 느껴지고 한국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한국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겉으로 많이 뱉어내는 사회로 인식하고, 동의해~ 정도의 얕은 깊이로 공감을 말하기보다는 비공감주의를 선택하고, 선택지와 가능성이 너무 많아진 시대에 '능동적인 절제'를 말한다(68).


그의 시선은 분명 자신으로부터 시작했지만 분명히 밖으로 이동한다. 자신처럼 이 사회가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데 여기서 공간은 상징적인 표현일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 작업만 하는 작가에서 편집장이 되어보거나, 완전 무결한 비건이라는 이상적인 주장에 대해 동물 도축을 줄여나가는 현실적인 실천으로의 96% 비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과잉된 자아를 가진 예술가 중 한 사람인가 고민하며 자신이 되게 싫었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좀 더 좋게 느껴진다'는 말에 사회 안에서 한 자아로서 건강한 고민을 통해 한 발씩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냥 보통의 사람, 김원영


골형성 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김원영 변호사는 존재 자체로 우리의 시선을 나에게 타인으로 이동시킨다. 전형적이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기던 그가 지금의 ‘우아함과 아름다움과 노련함과 유머’를 갈고닦은(190) 과정은 낯설지만 이해된다. 자신의 신체를 타자에게 보여주고, 이성적 관계를 경험하며 '편애받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는 사실 비장애인에게도 다르게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차별적인 존재인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존재에게 인정받는 경험은 우리 모두가 사회 안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보수적, 진부한 관점에서는 장애인을 너무 동정이나 감동의 서사로만 보고, 정반대로 진보적인 인권 운동의 시선에서는 너무 정치적인 투사처럼 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의 욕망’이 가려지는 것(220)이라는 설명에서 우리가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맺어야 할 관계도 그냥 보통의 사람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머리만으로라도 해본다.


 



사실 이 인터뷰는 하나의 주제나 메시지로 잘 엮이지 않는다. 책에는 여러 번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55)'

'나는 당신에게서 배우고 싶다고(190)'

'작가님에 비해 제가 너무 라이트급이라(192)'


아마도 인터뷰집의 제목에 '존경'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것이다. 결국 이슬아 작가가 반한 삶을 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였다. 많은 문장에서 소외된, 소수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지난 시대의 가치와 세속적인 것들한탄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의도한 메시지일 것이다. 그래서 아쉬웠다.  일기장에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몰래 쓰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보다는 조금  설득적인, 넓은 시야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슬아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윤리의 기준이 매 해, 매 달 빠르게 재정립'되는 세상이기에 비난과 한탄보다는 대화와 기다림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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