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정보와 지식이 필요하거나, 인생 선배에게 지혜와 위로를 얻고 싶을 때, 간접경험이 필요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서도. 이 중 따뜻한 위로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하다.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있는 사람도 때로는 노골적이고 유치한 공감과 위로의 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 베스트셀러는 대체로 도움이 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한 지인이,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메모와 함께 선물한 책이다. 읽지 않고 고른 책이라지만 책 띠지 분위기상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고 싶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삼분의 일 쯤 읽고 이런 잔잔한 위로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고, 중반이 넘어가자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인생의 진리 같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평행 우주론에 설득당해서 모든 것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일 수 있다 생각하게 되었다.
베스트셀러는 너무 쉽고, 너무 뻔하고,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서 취향 없는 사람들이 읽는 책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책 역시 삶을 되돌릴 수 있다는 설정, 명대사, 명언이 가득한, 신선함과 짜릿함보다는 오그라들고 민망한 순간이 많다. 그러나 망했다 생각했을 때, 포기하고 싶었을 때, 우울한 순간에 놀랍게도 위로가 됐다. 늘 어려운 것, 생각하게 하는 것에 끌리고 그로 인해 삶이 한 발씩 나아가는 것 또한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의외로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학교 도서관에서 체스를 둘 때 퀸과 룩을 빼앗기고 나면 넌 이미 게임에 진 것처럼 굴었어... 체스에서 한 번이라도 이기려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해. 체스판에 폰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경기는 끝난 게 아니야. 폰은 하찮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폰은 차기 퀸이야. 넌 그저 계속 앞으로 나아갈 방법만 찾으면 돼.(269)"
베스트셀러는 폰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알아본 누군가에게는 퀸이 된다. 폰을 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갈지 말지만이 나의 선택인 것이다.
과학에서는 삶과 죽음 사이에 '회색 지대'라는
신비한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사이에서
우리는 모든 양자 가능성이 되는 겁니다.
주인공(노라)이 죽기 스물일곱 시간 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죽음의 날(D-day) 모든 것이 끝나는 대신 그녀를 죽음과 삶의 경계인 회색 지대로 보낸다. 거기서 그녀는 '후회의 책'을 통해 자신이 살 수도 있었던 다른 삶들을 선택해 여행하고 완전한 만족감을 느끼는 삶이 있다면 영원히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보기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능동적으로 상상해서 선택해야 하기에 새로 살아 볼 삶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분명 하나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셈이다.
파혼했던 남자와 결혼하는 삶, 수영을 계속해서 메달리스트가 되는 삶, 세계적인 락밴드 보컬이 되는 삶,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삶... 그녀 인생에서 일어 남직했던 일들, 가장 후회가 많이 남는 옵션부터 시작된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헤어진 연인, 직업적인 성취, 가족 관계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선택해 봄직한 삶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엘름 부인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거쳐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유기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 자신만의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을 꾸려 사는 삶 등을 차례로 여행한다.
예상 가능하듯이 결국 그녀는 그 어떤 삶에도 그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매번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대체로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을 잃은 삶이었고,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삶 조차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고 돌아오고 만다. 본인이 만든 삶이 아니기에 완벽한 삶 속의 자신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했더라면 내 삶이 훨씬 행복해졌을 거야"라는 생각이 얼마나 판타지인지 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깨닫는다. 그러나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최소한 이렇게 경험 하나하나를 나열해 줘야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 도서관이 무너져 내릴 때 정말 원하는 바를 적게 된다. 고민 따위 그만두고 서둘러, 확실히, 대문자, 일인칭 현재 시제로!
살고 싶었다..
살기로 마음먹었다..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살아 있다!
스스로 한 선택이었기에 그녀의 삶은 이제 이전과 다르다. 삶이 얼마나 광활한지 경험했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 느낄 수 있는 감정이 한없이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울과 절망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희망을 얻었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보고, 즐기고, 대화하며 행복 해할 잠재력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라는 자신이 삶을 끝내려고 했던 이유가
불행해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08).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진정 원하는 삶을 꿈꿔보길 권하고 이뤄질 수 있다 말하는 것이 단지 내가 살아보니 그래가 아니라 어느 정도 과학적 가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목표를 정하고 향해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그런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양자 물리학의 다세계 해석[1]은 이를 뒷받침한다. 하나의 나무에서 나뭇가지가 갈라져 나가듯이 갈라진 평행우주[2]가 무한히 존재하며 다만 그 세계들 간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이나 이동이 없기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노라는 그 세계들 사이를 오가는 '이동자'라는 설정이다)
다른 우주에서 가능하다면 이번 삶에서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마음속에 명확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갖기만 하면 된다.
꿈을 크게 가져요.
당신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존재하니까요(219).
과학에서 시작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쪽으로 흐르는 전개에 조금 마음의 문이 열린다. 그래, 어디 한번 믿어볼까? 책을 읽는 내내 감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생각으로 의심하고 근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생각과 감각은 제로썸 게임이다. 이제 생각(걱정) 말고 현재, 지금을 오롯이 수용하고 그대로 느끼고 행동하자고 다짐한다.
나는 후회하고 돌아가고 싶은 삶이 딱히 없는 것 같다 생각했지만, 이 글이 마무리될 때쯤 내가 매일매일 다섯 살만 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5년 전쯤에 지금 정도로 커리어가 정리되고 독립해서 일도 해보고, 지금처럼 늦었다 생각하지 않고 자신 있게 연애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보다.
살아 돌아온 노라가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릴 수도 있고, 더 많은 노래를 작곡할 수도 있고, 아니면 돈을 모아서 석사 과정을 공부할 수도 있다고 되뇌는 것처럼 나도 회사의 대표가 될 수 있고, 햇살이 잘 드는 사무실을 가질 수 있고, 좋은 동료들을 만들 수 있고,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동네에서 마음이 넓고 유쾌한 남편과 매일 아침을 맞을 수 있고, 팔뚝 고민 없이 나시를 입을 수 있다. 나열하고 보니 솔직하고 참 웃기다. 이제는 명확한 목표와 도달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단 하나의 소망을 적어야 한다면 뭐라고 적을 것인가.
나는 사랑하며 살고 있다
[1] 양자 물리학 : 19세기 중반까지의 과학 실험들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했으니 그 이후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의 이원자 입자와 관련된 실험들의 결과는 고전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할 경우 모순이 발생해 새로운 역할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양자 역학은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고 고전역학은 주로 연속적인 물리량을 다루는 거시 세계에서 탐구가 이뤄졌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래사장을 멀리서 바라볼 때 그 표면이 연속적으로 보이지만 점점 모래사장 가까이 다가가 모래사장을 관찰한다면 모래사장의 표면은 불연속적으로 관찰된 것이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양자 물리학에서 모든 대체 가능성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이 설명은 상자에 든 고양이는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있다고 설명하는데 모든 우주는 다른 모든 우주와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2] 평행 우주 :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세계)가 아닌 평행 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론으로 과학적인 실존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양자 역학의 다세계 해석에서는 평행 우주를 나무에서 가지가 자라듯 가지가 갈라지는 시점에 현실과는 다른 선택, 다른 일이 벌어지는데 예를 들면 현실에서는 복권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샀다면 우주의 무한한 평행세계 중 한 곳에서는 복권을 샀는데 1등에 당첨된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