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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올로스 Apr 06. 2023

신도림역 줄 서기로 본 인간의 이기성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신도림역 2호선을 이용하면 일반 승차 플랫폼 이외에 신도림역 출발열차 플랫폼이 있다.

오전에만 사용되고 이곳을 이용하면 외선순환열차가 출발을 하기 때문에 빈 열차를 탈 수 있고 주로 신도림에서 거리가 먼 강남, 잠실 운동장역을 이용하는 승객이 "앉아 갈 수 있으니" 장거리 출근인들이 애용을 한다.

일반 적인 승강장에서는 두줄서기가 원칙이다. 가운데로 내리고 양 옆으로 승차를 한다.


하지만 승강장 폭이 좁고, 내리는 사람이 없는 신도림역 외선순환 출발 열차 승강장에서는 3줄 서기가 암묵적 룰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역내 방송을 통해 세 줄서기를 장려하고 있다.


두 줄서기를 하면 뒷 열에서는 좁은 승강장 덕분에 줄이 휘어서 사실상 줄이 깨진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막히고 줄도 이상해지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에 세줄서기를 한다. 두 줄로 길어진 줄에서 짧은 시간에 먼거리를 달려 자리를 잡으려니 밀고 뛰고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세 줄서기를 장려하는데 두 줄이 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줄이 만들어 짐에 있어서는 "세 번째 오는 사람"의 역할이 크다. 첫번째 두번째 사람은 두줄서기를 하던 세줄서기를 하던 첫번째 행에 배치된다. 세번째 오는 사람은 이제 두 번째 행에 설지 첫번째 행에 설지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두번째 열에 선다. 네번째 오는 사람도 눈치를 보다 두번째 열에 선다. 그러면 두줄로 서기가 되는 것이다. 계단 앞에서 두줄서기로 이동을 막으니 혼잡하고 줄은 플랫폼 끝을 넘어 휘어진다.

 그러나 앞에 첫번째, 두번째 열 사람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착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역내 방송을 한다. "이곳은 혼잡한 플랫폼이므로 세줄서기를 통해 안전하게 탑승해 주시면.."

그래도 다들 열심히 이어폰을 통해 본인의 노래만 듣는다.


나 역시 두줄서기로 앞에 열차를 보내고 나니 내가 두줄서기 3번째 줄에 서있었다. 뒷자리의 불편함을 경험했고 다른 출입문에선 세줄 서기를 하길래 앞으로 걸어나가 세줄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어떤 4,50대로 보이는 두줄서기 2열 사람이 말한다. (두줄서기를 만든 장본인으로 보인다.) 왜 뒤에서 앞에 오시냐고. 새치기 하시냐고


내가 말한다. "비켜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세줄 서기 플랫폼입니다."


그가 말한다." 아니 다들 두줄로 서는데 앞으로 오면..."


그와중에도 역내 방송은 말한다. 이 승강장은 매우 혼잡한 승강장이므로 세줄서기를 통해 질서 있게....


그렇게 난 비켜주지 않았다.그렇게 두줄을 세줄로 만들었다. 세줄 서기 자리에서 두줄을 만들지 말고 그가 앞으로 오겠다면 언제든 비켜주겠다고도 했다.


내가 놀랐던 점은 그 뒤에 일이다. 내가 세줄을 만들었으면 뒤에서 사람들이 세줄을 서줄줄 알았다.


하지만 두줄서기의 2행, 3행 사람들은 움직여 주지 않고, 그대로 두 줄을 고수했고 줄은 또 멀리서 휘어지고 있었다.


2행, 3행의 사람들이 움직여 주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차피 난 2행, 3행이라 착석하는데 손해 볼게 없는데 굳이 아침부터 싫은 소리 들으며 감정을 망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불필요한 일에 끼어서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내가 두 줄을 만든 것도 아니고 통행에 지장을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런 것이다.난 책임이 없다.


나 역시 2열 3행의 자리에서는 착석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세줄서기가 원칙인점. 비록 두 줄을 세줄로 만들면서 나오는 갈등 혹은 최소한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 하면서도 플랫폼 먼 거리의 줄을 선 사람들이 편하고 안전했으면 하는 점 때문에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두 줄서기 5행까지는 조금만 뛰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본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대중과의 마찰을 하며 아침부터 피곤할 이유가 없다.


이런 다수의 무관심, 관례, 트롤리 법칙,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과 같은 철학시간에 배운 고민들이 떠오른다.


나는 당장 손해가 없다. 하지만 뒤에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굳이 내가 나서서 감정적 소모라는 불이익을 조금도 감내하기 싫다. 부정에 대해 대중에 숨으면 마음이 편하다. 다들 그러하니 내가 굳이 틀을 깨고 싶지 않다. 라는 엄청난 생각들을 본 하루다.


나도 그러지 않을까?? 노조 위원장은 부당함을 외치고 있지만, 공감을 하면서도 정작 노조에 가입이 꺼려지는 것은 같은 프레임과 나 역시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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