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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Oct 14. 2021

F code

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술이 잔뜩 스며든 새벽, 샤워기로 하루를 씻어낸다. 하루 어치 감정들이 물줄기를 따라 사라져 간다. 모든 작업은 30분 안에 끝난다. 화장실 문을 열면 오늘 있었던 일들은 과거가 된다. 내가 할 일은 남은 물기마저 남김없이 닦아내는 것. 침대에 누워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 잠드는 것. 그 외엔 없었다.


 오늘은 이렇게 끝났구나. 내일도 이렇게 끝나겠구나.


 무력했다. 내일이 기다려진 적이 언제였을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내 짧은 손가락 사이로 하루는 반복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 얕은 모래 알갱이들이 되어 소리 없이 부지런히. 나는 오늘도 그것들을 붙잡지 않았다. 어느새 새벽은 이 사실에 대해 자책하는 시간이 되었다. 오늘 했어야 했지만 미뤄버린 일, 하려 했지만 지쳐서 하지 못한 운동, 내일로 미룬 내일을 위한 공부. 어느 것 하나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밤은 눈을 감지 못했다. 침대 위에 지난 시간들에 대한 미련이 끝없이 놓인다.


 혼자 누워있는 7평 남짓한 원룸에서는 누구도 이 과정을 막을 수 없다.


 생각은 서로의 발목을 잡다가 끝내 중학교 시절까지 떠오르게 만든다. 검지 손가락의 길이가 충분하지 못해 소리를 전부 낼 수 없던 기타가 보인다. 나는 친구들과 교회 구석에 앉아있다. 잔주름 가득한 손에 금반지가 가득하던 목사님이 우리에게 기타의 코드를 알려준다.


 "자, 검지를 전부 써서 여섯 줄을 다 막으면 f code가 되는 거야."

 

 검은색 통기타가 목사님의 말끝과 함께 맑은 소리를 낸다. 우리는 그 모습을 따라 해 보지만, 둔탁한 소리만이 교회에 퍼진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잡고 있으면 도와줄게."라고 말한다. 한 명씩, 한 명씩 맑은 소리를 낸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된다.


 "소리를 내기엔 손가락이 짧아서 안 되겠네. 이걸 쓰자." 그는 내게 커다란 집게를 준다. 나는 그 집게를 기타에 꽂고 소리를 낸다. 맑은 소리가 난다. 하지만 내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부터 기타를 내 방 책장 뒤편에 넣어 버렸다. 먼지가 쌓여 잊히게 만들었다. 숨기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나조차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면 이런 일 쯤은 쉽게 해결돼있겠지.


 "미안해, 달라진 게 없어."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중학생 시절의 내게 답한다. 작은 원룸에 둔탁한 대답이 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걸 15살의 내게 말한다. 꽤나 여러 번 소리 내지 못한 사랑에 도망쳤다고, 아직도 이력서는 빈칸이 많다고, 아직도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웃음을 잃어가며 지하철에 몸을 싣는 무표정의 어른이 되었다는 걸 전한다.


 결국 너의 기대와 달리 검지 손가락은 아직도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수없이 과거가 지나가고 있지만,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여전히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지금에 닿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중학교 시절, 소리 내지 못한 F code를 울리게 할 방법은 기타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타 줄을 내 손에 동여매고 눌렀어야 했다. 글과 이력서에서 남들에게 들려줄 만큼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내 몸이 피곤에 짓눌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밤을 뛰어야 했다. 설령 내일이 변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그 코드를 누르는 날에 다가가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어떤 날에, F code를 담은 기타 소리는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겠지.


 그렇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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