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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Oct 24. 2021

한 곡 재생

브로콜리너마저 <앵콜요청금지>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노래 한 곡만을 들었다. ​


 곧 있으면 들어올 월급으로 살 모니터를 구경하고, 나와 관련이 희미한 세상 일에 관심을 조금 갖다가 겨울에 발맞춰 일찍 문을 닫은 태양을 따라 조금 이르게 퇴근을 했다. 4층부터 느리게 계단을 내려가며 귀에 에어팟을 꽂고 아스팔트 바닥과 조우했다. 마스크 사이엔 냉기가 스며들었다.

 "끝나버린 노래라..."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밤하늘을 보며 혼자서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있던 건물과 담벼락의 나뭇가지들 틈새로 비행기가 날아갔다. 삼각형 끄트머리에 빨간 조명들, 소리는 노래에 묻힌 밤 비행기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저 모습을 보면서 설렜을 텐데, 어디로 돌아가야 그 감정을 느낄까. 어디에서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그때부터 과거를 밟으며 집에 갔다. 스쳤던 수많은 인연들과 추억들이 아스팔트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첫사랑부터 얼굴만 알던 사람들까지, 혼자 갔던 해외여행부터 너와 갔던 근교 여행까지 거리에 흩뿌려져 있었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슬펐던 기억들을 밟을지, 좋았던 일들을 밟을지. 어린 시절 같은 색깔의 보도블록을 밟으며 놀았던 것처럼. 나는 귀에 꽂힌 노랫말에 맞춰 차분히 슬픈 일들을 밟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의 차가운 길에서 행복한 일을 떠올리며 걷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그런 소수의 사람이 될 기회가 없었으니 평범한 불행들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최근의 일부터 밟다 보면 해답을 찾거나, 결론이 나지 않을까. 혹은 이젠 사소한 일이 되어 내 입꼬리를 놓아주지 않을까. 하나 둘, 불행을 걸었다.

 어제 게임에서 진 사소한 것들부터 하루 씩 거슬러가다 널 마주했다. 다시 만난 내 첫사랑, 너와 쌓아 올렸던 가을 그리고 서로 비어버린 프로필 사진까지 내게 밟혔다. 널 만났던 것은 확실히 불행이었다. 일부러 멀리 돌아서 집에 가는 지금 이 순간을 만든 원흉이었다. 나는 네게 남김없이 감정을 주고, 넌 저 멀리 흘려보냈다. 우린 서로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서로 달랐다. 나는 널 사랑했고, 너는 날 친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추억 속 다른 느낌을 가질 뿐이었다.

 그 추억들 속에서 너는 내 표정을 만들었다. 나는 마스크도 가릴 수 없이 행복했다. 그 순간들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위해 우유를 사고, 네가 좋아한다는 야채들을 냉장고 넣고, 카페에 가서 서로의 취향을 알았다. 그리고 같이 걸어가며 구름 낀 맑은 하늘을 사랑하는 네 모습을 사랑했다. 행복했기에 이제야 불행하게 되었고, 불행하기에 그때가 더 행복했다.

 내가 잃어버린 건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다 써버린 것뿐이었다. 밤 비행기를 보며 설렜어야 할 감정까지 끌어다 줘버린 것뿐이었다. 더 이상 밟을 추억이 남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어 냉장고로 향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시들어버린 야채 그리고 먹다 남은 돌체 라테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우리의 끝이 한 해의 끝보다 빨리 왔음을 인정했다.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 서로 멀어질지도 모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에어팟을 뺐다. 내 방은 아름답지 못하게 조용해졌다.

"그래 끝났구나."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 곡을 위해 노래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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