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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Sep 15. 2021

잊혀져 가는 그대에게

짙은 <잘 지내자, 우리>

 오후 6시, 평소보다 일찍 저녁을 먹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도, 누군가를 만나는 약속도 딱히 없는 저녁이었다. 나는 퇴근길에 꽤나 자주 들리는 일식집에서 평범한 맛이 나는 덮밥을 먹고, 습관처럼 2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했다. 커피가 밑까지 잘 섞이도록 한 번 흔들고서 종종 앉는 학교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오전부터 흐릿한 회색이었고, 조각구름이 적당한 변주를 주고 있었다. 나는 저번에 다친 아랫입술 안 쪽 부분을 조심하며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벤치 앞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지구 반대편을 생각한다.


 지구 반대편, 그곳은 모든 것이 정 반대여야 한다. 오늘처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에 그곳은 조금은 더워져야 하고, 이곳이 맑은 만큼 비가 내려야 한다. 뭐 위도나 경도 같은 세세한 것까지는 따지지 않겠다. 어디까지나 '지구 반대편'일 뿐이니까. 특정한 나라, 특정한 문화는 없다. 다만, 모든 것이 반대인 그곳에는 네가 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스쳐 지나간 네가 그곳에 있다.


 "우리 지나간 일들은 다 잊고, 다시 시작하자."

 "미안해, 우리는 돌아갈 수 없어."

 

 너의 제안을 거절한 날을 끝으로 우린 멀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의 온도는 달랐고, 더 이상은 없었다. 물론 서로를 한 번에 잊을 수는 없었다. 나도 너를 잊지 못했고, 너도 이따금 내게 연락을 했었다. 우리는 고장 난 우산처럼 쉽사리 마음을 접지 못했다. 서로가 흘리는 눈물에 못 이겨 우산은 자꾸만 펴졌고, 그때마다 처음 만났던 2015년으로 돌아갔다. 거짓마저 사랑했던 그때로 돌아가 멈춰있고 싶다고 말하며 서로에 대한 어쭙잖은 희망 방정식을 계산했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더 이상 네 연락을 받지 않았다. 네 사진을 지웠고, 인스타 계정을 지웠다. 꼭 이사를 하는 사람처럼 너를 정리했다. 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여름은 조용했다. 이따금 무심코 틀은 음악 플레이리스트에 네 흔적이 있었지만, 그리 큰 소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너를 봤다.


 스타벅스 텀블러와 아이패드 파우치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서 너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연한 청바지와 함께 입은 노란 선이 들어간 하늘색 반팔 니트는 변함없이 네게 어울렸다. 너는 나를 보지 못했다. 여전히 길을 걸을 때 주변을 보지 않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어쩌면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른다. 네게 익숙한 향수 냄새와 옷차림이 나일까 두려워 빠르게 나를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결국 어찌 됐든 우리는 서로를 보냈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너를 지구 반대편으로 보낸다. 우리는 지구를 반 바퀴씩 돌아야 만날 수 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가버리거나 적게 간다면 우리는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아마 그 사실도 모른 채 각자의 영역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어떤 날은 더 많게, 어떤 날은 더 적게 걸어버려 결국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잃어버리겠지. 그렇게 우리의 스무 살과 스물 하나, 스물다섯은 각자의 걸음에 맞춰 잊혀 간다. 늘상 의식하던 너의 습관도 점차 희미해지고 일상에서 널 떠올리는 게 어색해질 것이다.


 만에 하나, 서로가 서로의 절반을 정확히 맞닿게 되어도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날에도 너를 알아보길 바란다. 흐른 시간만큼 네가 변해 하늘색 니트가 어울리지 않게 되더라도 너를 한눈에 알아보고 싶다. 찰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네게 다가가고 싶다.


 "오랜만이네."

 

 나는 네게 인사한다. 그날은 오늘 아침과 다르게 먹구름이 희미한 날이다. 옅어진 먹구름 뒤 하늘은 연한 하늘색 사이로 노란 햇빛이 스며들어있다. 너는 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잘 지냈어?"라고 묻는 나를 향해 잠시 하늘을 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잠시 각자의 걸음을 멈추고 가까운 벤치에 앉는다. 서로가 있던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걸어가야 하기에 모든 것을 들을 수 없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래, 다음에 보자."


 우리는 그렇게 다시 지나쳐간다.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지구 반대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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