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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오 Oct 13. 2021

그리운 내일

카더가든 <나무>


 여행은 순식간에 끝났다. 24시간이 넘던 시간은 제멋대로 모습을 감췄다.


“그림 제목이 뭐라고?”

“화양연화.”


 대구 서부 정류장으로 나를 마중 나온 친구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화양연화,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


 난 왜 그런 제목을 그림에 붙였는지 이유는 묻지 않고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전시회장은 매우 작았다. 다 해서 30점 정도 돼 보이는 작품들이 내가 사는 원룸을 두 개 정도 이으면 될 정도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각자의 그림 밑엔 당사자의 졸업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은 꽃들이 놓여 있었다.


“꽃이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여기 왔으면 됐지, 꽃은 시들어.”


 참 우리 다운 대화였다. 친구는 자신이 그린 그림 앞에 서서 사진이나 찍어달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풍 옷을 입은 중성적인 여성이 뒤를 돌아보는 그림이었다.


“홍콩 영화에서 따왔어.”


 그는 머쓱한 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별말 없이 그림을 10분 정도 보다가 생각보다 잘 그렸다고 말해 줬다. 딱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길지 않은 관람을 마치고 전시회장을 나온 뒤, 도착한 술집에서 필요한 말들이 놓였다.


 “난 우리가 루브르를 갔을 때가 그리워.”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겨우 모은 300만 원 남짓한 돈으로 넷이서 갔던 유럽여행, 그는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고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조금은 충동적이었지만 매우 ‘그’ 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그 결정을 하던 때의 자신이 그립다며 말을 덧붙였다.


 좀 더 희망찼고,  좀 덜 후회했던 그날들. 우리는 그런 시간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다. 이제는 어떤 것을 결정하는 순간이 설레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쳇바퀴보다 지루해졌다. 우리의 대화 역시 언제부터인가 옛날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가 가득했다.

“그래, 나도 그때가 그립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내게는 돌아가고 싶던 순간이 없었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짝사랑하고, 다시 살을 빼야 했다. 내게 과거란 그리 찬란하지 않았다. 친구가 그리워하는 시절의 난 후회를 쌓으며 살고 있었다.


 이에 더해, 그날들로부터 어느새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도 날 두렵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고민에서 많은 것이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 두려웠다. 친구에겐 찬란했던, 좋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내겐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그날들 사이 어딘가에 멈춰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말을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그립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겼다. 우린 꽤나 많은 술을 먹었다. 나는 이미 취기가 돌고 있었고, 왜인지 모르게 머릿속에선 나무 밑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번개를 맞았는지, 누군가 가구를 만들려고 베어낸 건지 모르지만 밑동만이 남은 동그란 나무였다. 사람들이 앉기엔 나무껍질이 거칠고, 나이테 부분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나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할지도 몰랐다. 잎도, 열매도, 가지도 없는, 황량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의 뿌리는 깊숙하게 박혀있었다. 수많은 풀벌레와 잡초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속의 양분과 수분을 먹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나무로써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쩌면 술에 취해 누워있는 나보다 더 절실히 살아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무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는데, 난 스스로 모든 걸 버리고 있었다. 저 나무와 달리, 뿌리가 잘려버린 걸지도 모른다. 뿌리를 잃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 떠돌이. 어떠한 목적도, 방향성도 갖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라는 겉멋에 휩싸여 살아감을 당하는 것. 그것이 내 모습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한다. 나는 황망한 발걸음 사이에서 갈증을 채우지 못했다. 잔뿌리조차 내리지 못했다.


 그런 나의 취기 속에 나무 밑동이 떠오른 건, 이젠 돌아갈 곳을 갈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분명 아직까지 삶에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즐거운 시절도 없고, 나아가고 싶은 곳도 없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아련한 눈빛이 생길 정도로 그리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그건 아마 내일이 아닐까.


당연히 돌아오는 다음 날이 아닌, 내가 언젠가부터 닿고 싶던 순간, 언젠가 꼭 만나게 될 순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길을 걷게 되는 내일,

내가 가슴 뛰는 일을 하다 새벽을 바치는 내일,

친구들과 마스크를 벗고 여행을 떠나는 내일.


 나는 그 내일이 드리워지는 날에 뿌리를 내린 밑동이 되고 싶었다. 설령 그날에 내가 가진 모든 껍데기를 잃더라도 상관없다. 그날에 난 진정한 나무가 될 테니.


 그렇기에 친구의 물음에 “나도 그때가 그립다.”라고 말했다.


 거짓 한 점 피지 않은 진실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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