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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21. 2023

3년 만에 조기졸업! 단순한 마케팅 슬로건 그 이상.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2. 넘어지고 일어서고 

‘3년 만에 조기졸업!’ 내가 베트남어 강사를 하며, 하나의 마케팅 슬로건(?)으로 밀고 있는 문구 중 하나이다. 아, 이 조기졸업 네 글자에는 사실 남모를 사연이 있다. 


 베트남에 처음 가게 된 계기는 단기 어학연수였다. 

베트남어가 전공이니, 베트남에 어학연수를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 역시 부산에서 다니던 대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온 베트남 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서, 또 베트남어에 욕심이 생겨서 그렇게 어쩌다 한국 학교를 쭈욱- 쉬기로 결정했다. 이름하여 ‘자퇴’. 


 06학번으로 입학했던 나는, 다시 08학번으로 시작해야 했다.(심지어 가을학기에 첫 입학)

 2년 반이나 늦었지만, 베트남에서 공부하는 것 그 자체로 설레었으니까, 가치가 있으니까? 해볼 만했다는...



절~대 아니다(!)


 내가 그렇게 호기롭게 자퇴를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베트남 대학교 측에서 한국의 대학교에서 이수한 1년간의 학점을 인정해 주겠노라고 구두 약속을 했다. 그리고  한국 교수님들의 추천서를 요구했다. 

 어떤 교수님께서 자신의 학교를 떠나 타 학교로 가는 것에 두 팔 벌려 환영이겠냐만은, 열심히 찾아뵙고 교수님들을 귀찮게 괴롭혀서(?) 추천서를 받았다. 


그렇게 교수님들께 추천을 받고 한국의 학교를 자퇴처리 했다 그리고 베트남으로 ‘다시’, 그리고 ‘꽤 오래’ 떠나기로 결심했다. 



 자, 그러면 이제 3년만 더 공부하고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고. 

학교 측에서 한국에서의 학점을 인정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점 계산 방식도 다르고, 이수과목도 차이가 있기에 다시 1학년부터 재 입학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베트남어’ 였던 한국학교와 ‘베트남학’이었던 베트남 대학교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 대학교에서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가 보기엔 도긴개긴으로 보이는걸? 


 무슨 날벼락인가 싶지만, 나는 이미 돌아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재 입학은 너무나 억울했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1년 정도 같은, (아 아니) 비슷한 전공과목의 학점이수가 된 상태였고, 또 베트남에서 1년 정도를 어학연수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다시 시작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학교 측을 설득하려 했다. 그리고 당연히 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08 VNH(베트남학) 윤선애’ 

그렇게 나는 다시 신입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1학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한국에서의 학점이 인정 안된다면, 여기서 학점을 그냥 1년 치를 모두 당겨서 들으면 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무식하지만 또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생각. ‘내 생각’ 말이다. 

 그리고 당장 교수실로, 그리고 행정실로 달려가 내 생각을 피력했다. 


 입학하기 전부터 그렇게 자주 찾아와 귀찮게 하더니, 입학한 후에도 정말 피곤하게 한다고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의 시간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제가 빈 시간에 다른 학년 수업을 넣어 듣겠습니다. 

그렇게 1년 치 학점을 모두 앞당겨 들으면 제가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라고, 하니 행정실에 계신 담당자분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높으신 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아, 그때 내 베트남어 수준은 그렇게 막 아주 훌륭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들 속에 아주 비약적으로 다듬어졌다는 후문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의견을 잘 전달해야 했고 또 그 대답을 아주 정확히 들어야만 했다. 또다시 처음과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이렇게 와서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행정실 담당자분들은 당황해하셨다. 

‘저도 처음이에요, 저도 매 순간 당황스러워요’ 하고 울분을 토하고 싶었지만. 

나는 늘, 잘 보이려고(밉상으로 찍히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저 좀 잘 부탁드려요. 도와주세요”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늘 웃으며 말하려 했다. 물론 베트남의 답답한 행정절차와 확실하지 않은 화법에 화가 부글부글 나는 순간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매일 찾아오는 아이를 딱 잘라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외국인의 조기졸업 문제는 그 누구도 아직 해본 적이 없기에 그 가능여부는 그들 역시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해내서 사례를 만들 테니, 시스템을 갖추어보자’라고 까지 학장님께 제안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학장님께서는, “너의 뜻은 알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문제도 있지만, 네가 1년의 수업을 다 앞당겨 듣는다는 것이 일단 불가능할 것이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시험통과도 어려울 것으로 안다. 해볼 테면 해봐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 해볼 테면 해봐라!라고 하셨죠? 그럼 저 진짜 합니다! 시험도 다 통과하고, 학점도 다 들으면 저 3년 만에 졸업인 거예요?”라고 정말 몇 번을 물어보며 약속을 받아냈다.

교수님과 학장님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과 함께, 해낼 수 없을 것이다는 확신의 빛만이 가득 차 있으셨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빈틈없는 시간표의 지옥. 나는 1학년이었지만, 1학년이 아니었다. 


시간이 비는 대로 2, 3학년의 수업을 챙겨 듣기 시작했다. 어떤 과목은, 교수님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기도 했지만, 또 그럴 때마다 설득에 설득을 이어가며 어떻게든 수업을 등록해서 들었다. 


 물론, 수업을 듣기만 해서도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설득에는 합당한 실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2, 3학년 수업 과목은 더 열심히 파서 공부를 해야 했고, 과제 제출도 절대 대충은 없었다. 


내가 우겨서 하는 것인 만큼,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할까. 

의심의 눈빛으로 쳐다보시던 교수님들의 눈빛은 내 열정과 성실함에 조금씩 나를 인정해 주시기 시작했다. 

 ‘1학년이 감히’라고 생각했던 선배들의 눈빛도 점차 호의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선배들이 내게, 질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조별과제에서 나는 그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기도 했다. 


 수업이나 과제는 그래도 할 만했지만, 시험이 하루에 모두 겹쳐버리는 날이면 정말 울고 싶었다. 아니 밤마다 울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수업을 들어도, 시험 통과가 안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에 정말 시험기간만 되면, ‘내가 미쳤지. 왜 이런 선택을 해서’라고 생각하며 눈물 콧물 다 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왜’ 그렇게 1년이 벌고 싶니?라고 물어본다면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늦어지는 게 나는 싫었다. 내가 보낸 시간이 의미 없는 시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서 그 의미를 ‘조기졸업’이라는 목표 달성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한국에서 친구들은 이것저것 공모전도, 취업준비도, 봉사활동도 하며 나름의 경험들을 잘 준비하며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베트남어 말고는 남는 게 없는 것 같아 초조했다.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가서, 나도 흔히 말하는 스펙의 것들을 채워놓고 취직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다 (수업을) 들었고, 다 (시험을) 패스했다’. 

그리고, “졸업가능”이라는, 내 귀로 듣고도, 내가 해내고도 믿을 수 없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이 일을 겪으며 내가 얻은 큰 깨달음이 있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이렇게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구나!라는 것이다. 안될 것 같다고 포기하지 말고, 내가 옳다면 일단 해보자! 그러면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거니까, 그리고 이렇게 기적도 생겼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소식은 졸업장을 내 손으로 직접 받기도 전에, 얼떨결에 취직이 되어 졸업식에는 참여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게 1+1급의 인생 선물이자, 그동안의 베트남에서 흘린 모든 몸과 마음의 땀과 눈물에 대한 보상인 듯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와중, 대기업에서 해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특별 채용을 진행 중에 있었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반신반의하며 지원을 했다. 준비된 건 없지만, 그냥 경험 삼아 열심히만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3학년과 4학년 수업을 동시에 들어나가며 있던 학기 중이었다. 학기 중 ‘넣어나 보자’ 했던 지원은 1단계, 2단계를 거쳐 어느덧 3단계 면접자리에 내가 앉아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턴쉽을 거쳐, 최종합격! 까지 가게 되었다. 

 매 단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모든 것을 쥐어짠 것은 맞지만, 또 매 단계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 적은 없었다. 

 

사실 취업준비라고 한 것은 매일 조금씩 하던, 토익공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인적성 검사는 무엇인지, 그렇게 많은 문제집과 동영상 강의가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일단 서류 통과를 하고 또 준비는 해야 했기에 며칠 밤을 새우며 인적성 준비를 했다. 그리고, 면접 준비 역시 해본 적이 없기에 면접자리에서 어떤 질문이 쏟아질지, 또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나는 정말 취직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했던 과정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베트남에서 보낸 시간들. 딱 그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깡을 믿으며 매 단계를 밟았고, 면접에서는 그렇게 내 이야기를 했다. 


 종이컵을 들면, 컵 안에 물이 흔들거릴 정도로 덜덜 떨었던 면접이었지만, 또 목소리의 떨림도 면접관님들께 다 전달되었겠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나는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그 질문은 결국 다 ‘나’에 대한 경험과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것만큼 잘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앞에 있는 것들을 해나가고, 벌린 것들을 우당탕탕 수습해 가느라 해오던 모든 순간들이 나의 하나의 어떤 역량이 되어 가고 있었다. 

 홀로 유학생활을 헤쳐나가며 얻은 나의 인사이트들이, 안되던 것들을 되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찾아가던 방법들이, 주말마다 방학마다 욕심을 부려 놀지 않고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들이...

 이 모든 경험들이 쌓여 나만의 어떤 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들처럼 한 줄 한 줄 정확히 써 내려갈 공모작도, 봉사활동의 경험도 없는 무스팩이었지만, 나답게 한 모든 경험들이 나에게는 자산처럼 남아있었고, 나는 그것을 ‘나로서’ 증명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조기 졸업에 그리고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조기 취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학과생활에서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외국인 최초로 조기졸업을 일구어낸 어떤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그건 내가 잘나서라기 보다는, 나만큼 하루하루 아득바득(?) 살아내던 친구가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 아득바득 살지 않으면, 내가 입학할 때 마음먹은 것을 이룰 수 없었기에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니?”, “하루가 참 갑갑하겠다”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다.

 대부분 동갑의 친구들이나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동년배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인생의 경험과 연륜이 많으신 분들은 나를 항상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며, ‘잘하고 있다’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해주셨다. 

나는 그 시선을 받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나도 나를 나 스스로 바라봐주는 일이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내가 하루를 열심히 꽉 채워 보내는 날, 그런 날의 내가 제일 예쁘다.



 문득 나한테 실망하는 날들도 찾아온다. 또 가끔은 내가 내 모습이, 미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희망하는, 또 나를 일으켜주는 기억은 바로 이때이다. 


 그래도 ‘해냈던 나’이고, ‘정말 열심히 살았던 나’ 임을 나 자신만은 안다. 그리고 그렇게 해냈던 나는 또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나를 향한 단단한 믿음이 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모두 나의 힘만으로 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나를 도와주시려고 했던 교수님들이 계셨고, 그냥 ‘안 되는 건 안된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를 지켜봐 주시고 가능하게 해 주셨던 학장님이 계셨다. 또 같은 학년도 아니지만 늘 외톨이였던 나를 챙겨주었던 선배들이 있었고, 나를 시샘하고 미워하기보다는 멋지다고 칭찬해 주는 동기들도 있었다. 




 몇 년, 터널에 갇힌 시간을 겪었다. 그리고 나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 보고 나는 또 이렇게 글을 쓰며 나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의 뿌리에는 참 열심히 달리던 예쁜 나도, 또 내 옆에서 함께 응원해 주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다시 한번 열심히 달리려는 이유이자, 내 삶을 긍정하는 이유. 그리고 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감사하려는 이유! 


 그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일어선 나를 향해 외쳐본다. 내 인생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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