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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20. 2023

"베트남에서 대학교를 다녔어요"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2. 넘어지고 일어서고

 “베트남에서 대학교를 다녔어요”라고 말하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한 스푼 더해진 호기심과 함께, 다소 확장된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곤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질문 세례가 시작된다. 왜 베트남이었는지, 혼자가게되었는지, 재밌는 에피소드라든지...


 연 7%대의 고속 성장을 달리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또 막상 살아보면 의외의 면에서 너무 발전되어 있어 꽤 살만한 나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베트남은 전쟁으로 가난한 나라, 개발 도상국, 국제결혼 등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지, 내 유학생활은 꽤나 화젯거리가 되곤 한다. 또 주변에 ‘베트남 유학’은 워낙 흔치 않은 사례인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또 그러한 기대에 맞춰주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어김없이 그 이야기보따리, 흔히 말하는 ‘썰’을 풀어주기 바쁘다. 내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들이 있고, 난 또 그 기대에 충족할 만한 경험들이 5년의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이다. 언젠가 베트남에 관한 에세이를 따로 써야 할 정도이다.


 베트남 유학 비용부터, 유학생활의 장단점,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 소매치기 n번 당한 이야기, 길 가다가 베트남 남자들에게 돌 맞은 이야기, 베트남 친구들과 문화차이로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 등등 참 풀자고 마음먹으면 밤을 새워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곳에 살았다는 것, 유학했다는 것 자체로서 내 인생의 하나의 ‘이슈 거리’가 되어주니, 또 이렇게나 많은 관심을 받으니 참 감사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강사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늘,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들만 받던 나였다. 그리고 준비된 레퍼토리로 아주 재밌는 썰을 풀어주던 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나이 35살. 일을 잠시 쉴 때였다. 운동을 하며 알게 된 친구와 고기를 구워 먹으며 그 간 살아온 이야기도 함께 안주삼아 맥주 한 잔을 하게 되었다.

또 어쩔 수 없이(?) 베트남에서 혼자 5년 정도 살면서 대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꺼내게 되었다. 20대를 말하자면, 또 내 업을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태종태세문단세’ 같은 그것. 베트남유학 아닌가.


 어떤 말을 먼저 풀어줘야 재밌을까, 혹은 내가 돋보일까 하며 얄팍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그 친구는 내 말이 끝나곤,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참 애틋한 시선으로 “너, 참 외로웠겠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커진 눈빛들만 바라보다, 살짝 쳐진 채 조금은 찡그러진 미간 사이로 온기를 뿜어내는 이 눈빛... '이 눈빛은 뭐지?'살짝 낯설었다. 그런데 낯섬도 잠시 난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낯섬이 아니라 내 젊은 날에 대한 어떤 위로이자, 공감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너 힘들었겠다. 외로웠겠다’ 하고 말해주는...

 그 아무도, 나 조차도 내게 건네주지 않았던 그 시선말이다.



 사실 그때는 외로운 시간인지도 모른 채 지냈다. 21살부터 25살.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명확한 그 ‘실체’를 모를 나이이다.

서른 중반이 넘은 지금은, ‘아, 나 외롭구나’라는 그 감정을 명확히 ‘만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외로움에 대응하는 나만의 매뉴얼도, 어리숙하고 서툴었던 지난날의 나를 단계적으로 밟아오며 꽤나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있다. (물론 언제 마주해도, 맞닥뜨린 그 순간은 어쩔 줄 몰라하긴 말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아! 한국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팝업창처럼 수시로 뜨는, ‘X’를 눌러도 또 뜨고야 마는, 그런 에러의 시기가 유학생활을 하며 주기적으로 찾아왔었는데. 사실 돌아보면, 그때가... 바로 그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 외롭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줬으면 좋았을걸. ‘나 외로워’라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 말을 했었으면 좋았을걸.



 그냥, 그 외로움인지 뭔지 모르겠는 이 감정이 낯설고 조금은 불편해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

 20대, 그래봤자 이제 겨우 갓 어른이 된 20대 초반인 것을. 꽤나 감정적으로 독립된 여성으로 보이고 싶었나 보다. 왠지 외로워하는 듯한,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듯한 분위기의 여자는 멋없어 보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남자친구가 있어도 ‘절대’ 외롭다고 말하지 않았다. ‘절대’ 의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그냥’ 열심히 살았다. 그것이 내가 이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멀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게 도움이 될만한 것은 뭐든지 하려고 노력했다. 잠시도 이 감정이 마음에 자리 잡을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하루를 꽉 꽉 채웠다.


 눈을 뜨자마자 요가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수업이 없는 날이면 무작정 냅다 뛰었다. 골목에 있는 자취방을 나와, 큰길을 쭉 따라, 오토바이들을 조깅파트너 삼아, 중심가에 있는 공원까지 말이다.

아침부터 햇살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고 아시아계 외국여자의 아침 조깅을 보는 베트남 사람들의 시선도 역시 조금은 따가웠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그렇게 많지 않을 때였고, 서양인들의 조깅은 그들에게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자신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아시아계 외국인의 조깅은 뭔가 또 새로웠나 보다.

 내가 조깅을 하면 베트남의 몇몇 남자들은 추파 아닌 추파를 던졌다. 휘파람을 부른다거나, 박수를 쳐주기도 하며 말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것은 칭찬의 그것은 아님은 정확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느 나라나 이상한 사람들은 있으니, 국민성에 대한 문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으려 했다. 사실 화를 낼 수 있는 깡도 없었기에 그냥 모른척하고, 뛰고 있는 내 발 한 발자국에, 흘러내리는 내 땀 한 방울에 그저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아침운동을 마치면, 샤워를 하고 이른 시간에 학교로 향했다. 베트남 대학교는 한국보다 아침 수업일정이 굉장히 이른 편인데, 매일을 수업시간보다 먼저 도착해서는 아이스 연유커피 한 잔과 함께 (당시에는 완전히 이해도 하지 못하는) 신문 한 부를 사서 야외도서관에 앉았다. 비록 베이글에 뉴욕타임스를 들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은 아니었지만, 나도 나름 뉴요커 부럽지 않은, 베트남 감성의 그 무엇이 되고 싶었나 보다.


 야외도서관이라.. 좀 특이하지만 낡은 에어컨이 그 구실을 하지 못해 후덥지근함과 갑갑한 공기가 감도는 실내도서관보다는, 건물 맨 아래층에 있어 그늘이 되어주는, 또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야외도서관이 더 인기가 많았다.

 또 이 야외도서관은 베트남 친구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사방이 트여있어서, 베트남 친구들과 말 그대로 수다를 떨면서 회화를 공부할 수도 있고, 혼자 밥 먹기 싫을 때는 클럽샌드위치 아, 아니 반미(베트남식 바게트샌드위치)를 봉지에 돌돌 말아와 도서관에 앉아 공부로 바쁜 척(?) 저녁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그날의 수업이 끝나면 나는 또 도서관에 앉았다. 도서관에 집착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도서관에 가면, 베트남 친구를 많이 만날 수 있고 또 금방 친해지고 나면, 학교 식당에서 저녁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또 그러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거리에서 음료도 한 잔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날이 금방 어둑해지고, 그렇게 또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 것이다.



베트남 친구들을 참 열심히도 쫓아다녔다. 베트남 친구들이 ‘어디 가자!’하는 것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갔다. 다른 학과의 졸업여행에도 따라가고 (나 혼자 외국인), 얼떨결에 베트남 친한 언니의 결혼식 들러리도 했다(역시 나 혼자 외국인). 실력도 많이 부족했지만, 베트남에서 리포터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덥석 하겠다고 했다.


 그냥... 나는 그랬다. “할래?”, “갈래?” 하는 질문에는 언제나 으걸! (ừ(으)는 베트남어로 yes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제삼자의 긍정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자면, 참 ‘현지화’를 잘한 친구일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객관성을 가지고 조금은 날 것의 그 솔직한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외롭지 않으려고 ‘외롭지 않을 기회’를 만들고, 또 잡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런 나의 기회 잡기 행보는 베트남에서 쭉 이어졌고, 한국에 오니 이런저런 나의 행보들이 굉장한 스펙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 외로움의 여정을 나만의 스토리가 있는 ‘스펙’으로 꽤나 멋지게 포장할 수 있었다. 또 그런 나는 온리원의 가치를 최고의 덕목으로 둔 어느 대기업의 눈에 들어와 뽑힐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지게 포장된 나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았고, 이렇게 이뤘거든?’ 하고 말할 수 있는...


 밉상처럼 보이는 건 싫어서 줄줄이 잘난척하면서 말하진 않지만. 누군가 나의 베트남 이야기를 궁금해하면, 이야기 속에 이런 나의' 열심히의 행보'를 양념처럼 항상 곁들였다. 나를 조금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어떤 요소로서 나는 아주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던 터였다.


 그 행보의 근저가 ‘외로움’이었다고 누군가에게 말을 해본 적도 없었고, 솔직히 나도 그때의 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잘 몰랐던 것이 어쩌면 맞다.


 그리고 이제는 내게는 뻔한, 하지만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이 ‘자랑양념을 곁들인 레퍼토리’와 10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도 않고 함께 살아가고 있던 와중에, 그 친구의 남다른 시선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내 레퍼토리의 양념을 뻔한 맛보다는 조금 더 깊고 새로운 맛의 퓨전으로 만들어주었다.



  ‘외로웠겠다’ 한 마디에 울컥 쏟아지던 눈물.

 잘 포장된 포장지안에 좋은 것, 예쁜 것만 있어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그렇게 생각을 해오며 살았다.


조금은 낯설고 불쾌한 이 감정은,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저 깊숙이 묻어두려고만 했다. 왜인지, 꺼내서 드러내기가 조금은 불편했다.


 외로움에 대한 인정, 뭐 그게 별거라고 말이다.



 ‘열심히 살아서, 내가 이루었다’ 보다, 더 인간적이고 솔직한 그리고 그러기에 더 깊이 있는 대답은

‘나 그때 정말 외로웠잖아. 그래서 열심히 살았더니, 뭔가 이루어져 있더라’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느끼한 자뻑보다는 덤덤한 사실의 고백 말이다.



  우리 집에 있는 둘째 꼬맹이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 지금 마음의 색깔이 바뀌었어”라는 표현. 

나는 이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모든 감정들을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라고 명명하기 이전에 ‘색’으로서 마음을 보는 아이의 시선.

 그것은 내가 모든 감정을 마주 볼 용기를 내주는 어떤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사실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어가고, 또 그런 내가 만들어낸 어떤 결과물은 다양한 색의 조합이 만들어낸 그 어떤 것일 것이다.

 우리는 때론, ‘부정적인 감정’은 마주 보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회피하며 살아가려 한다. 애써 그렇지 않은 척, 혹은 모른 척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그저 하나의 색으로 마주하기로 하고, 또 그것을 인정해 나갈 때..

그렇게 솔직한 ‘내’가 만들어 낸 그 작품들로 채워진 내 인생은 더 다양한 빛을 낼 수 있는 것 같다. 또 그렇게 진정 솔직하게 마주한 자 만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인생이 되는 것일 수도...


 그 친구의 애틋했던 눈빛, 그리고 진심의 한 마디에 내 마음이 어루만져졌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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