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2. 넘어지고 일어서고
‘수능이 끝나면...’ 이것은 모든 수험생들을 버티게 하는 전제가 아닐까 싶다. 공부가 잘 안 될 때면 ‘수능이 끝나면...’으로 시작하는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하나씩 채워가며 입시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비운다.
내게도 많은 리스트가 있었지만, 나는 원하는 대학에 턱, 합격한 뒤 제일 먼저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공부가 극 상위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엉덩이로 열심히 버티며 잘했던 나였다. ‘수능이 끝나면 과외를 몇 탕 뛰어야겠다. 그리고 아이팟도 사고, 엄마한테 용돈도 드려봐야지’ 하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확신이 무색하게, 난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부산에 있는 대학교를 결정했다. (내가 한 결정이기 때문에 ‘가게 되었다’라는 수동적인 표현으로 문장을 마무리 짓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가 한 선택이었기에,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간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서울에 좋은 곳에 합격한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베트남어만 보고 선택한 것이기에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사회적인 인식은 꽤나 냉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객관적으로 봐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당연히 과외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을 확정 짓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 선택한 아르바이트는 일명 ‘서빙알바’였다.
처음 한 곳은 시내 백화점 옆에 있는 만두집이었다.
신포 OO만두 식당은, 입구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찜기에서 만두 특유의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만두 한 판만 먹고 가야지’했던 손님들의 마음은, 입구에서부터 자극된 식욕과 함께 고개만 까딱 돌리면 깨알같이 적혀있는 메뉴판을 보고는 홀린 듯 주문을 했다. 그렇다. 이곳은 만두 말고도 몇 십 가지의 메뉴를 자랑하는, 메뉴별 다양한 서빙의 기술이 필요한 ‘토털 분식 서비스 식당’이었던 것이다.
나는 겁이 많은지라, 특히 뚝배기에 담긴 뜨거운 음식을 손님 앞에 놓을 때가 너무 불안했다.
'내가 잘못해서 손님한테 쏟아 버리면 어떡하지? 놓을 때 내 손에 닿아버리면 어떡하지?'
얌전히 있는 ‘알밥’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보글보글 생동감 넘치게 끓고 있는 ‘순두부찌개’는 쟁반 위에 이모님이 올려주시는 순간부터 내 마음의 불안도 부글부글 함께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나는 중요한 경기출전을 앞두고 있는 선수인 양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속 자기 암시를 했다. “할 수 있다. 실수하지 않는다!!”하고.
학교 다니면서 공부만 했지, 돈을 벌어본 경험은 전무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노동으로, 손님을 응대하며, 또 때론 실수에 사장님께 혼나가며 배워본 경험은 전혀 없었기에 참으로... 신선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벌써 입학 전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ㅜ 아주 깔끔하게(?) 과일대접을 받으며 돈을 버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하루 종일 서빙으로 팅팅 부은 발을 볼 때면 내가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름의 재미를 찾자면 또 꽤 재밌는 것이다.
손님이 나간 뒤, 자리를 치우며 한 번에 절대 들 수 없었던 접시들을 한 번에 쌓아서 치웠을 때의 희열감,
구멍 뚫린 큰 소쿠리에 뜨겁게 갓 나온 숟가락과 젓가락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서 빤짝빤짝 해졌을 때의 개운함, 토털 분식집에서 일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식사 골라먹기 (물론 1~2천 원 차이였지만, 비싼 걸 먹을 때면 사장님 눈치가 보이긴 했다) 등등.
해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힘들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새롭게 해 보는 일들에서의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느껴보려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이건 잠시의 아르바이트이기에 가능한 발상일 수도 있겠다. )
하지만 열심히 몸을 움직인 대가에 비하면, 최저시급으로 계산되어 받는 월급은 정말 터무니없었다.
과외하는 친구들과 비교하자면 내 몸의 가치는 좀 낮긴 했지만, 그래도 학생신분으로 돈 한 푼 못 벌던 내가 이렇게 벌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뿌듯했다.
벌써 15여 년 전이지만, 우리 엄마는 이때 내가 첫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벌어온 돈으로 선물해드린 ‘닥스 가죽장갑’을 겨울마다 여전히 끼고 다니시는데...
겨울만 되면, 그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딸이 처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준 거’라고 자랑을 하신다. 아마 우리 남편은 이 이야기를 매해 겨울 들었으니 8년 차다. (앞으로 더 이어질 테니 조금만 힘내라고 말해줘야겠다.) 어디에 두고 오시거나 해서 잃어버리셔도 기어코 꼭 찾아온 적이 몇 번은 될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세월과 함께 정말 낡고 낡아, 사용의 흔적으로 인한 가죽의 잔주름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마치 엄마 얼굴의 그것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마치, 아이들의 애착인형처럼 그렇게 애착하시는 지도 모르겠다. 딸이 처음 나름 몸을 써서 번 돈으로 사준, 당시 엄마에게 명품과도 같았던 닥스 브랜드의 장갑. 마흔 중반쯤부터 예순이 되는 시간 동안 당신과 함께 해 오며, 그 해 겨울의 딸의 고생과 당신의 추억들을 모두 담고 있는 이 장갑을 말이다.
19살의 겨울, 내게도 만두집과 엄마의 장갑만이 기억에 남아있는 듯하다.
친구들이랑 자유를 만끽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용돈은 내가 벌어야 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아르바이트 시간이 가까워지면 칼같이 버스를 탔다.
그리곤 시내 길 정중앙을, 입김을 내뿜으며(누가 만둣집 아르바이트생 아니랄까 봐 말이다) 참 열심히도 뛰어갔던 나. 볼이 정말 만두처럼 빵빵하던 그때의 내가 어찌나 귀여운지 이 글을 쓰면서도 씩 미소를 한 번 지어본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해 보았던 아르바이트는 바로, 횟집 알바였다. 정확히 말하면 횟집과 일본식 사케를 함께 파는 적당한 규모의 일식 식당이었다.
주류와 함께 파는 일식집인지라, 흔히 말하는 밤장사였고 나는 새벽 2시쯤이 돼서야 일을 마쳤다.
퇴근길, 아빠 나잇대의 양복을 입은 분들이 이 식당의 주 고객이었다.
사장님은, 정말 많은 단골 고객들을 확보하고 계셨는데. 여기저기 테이블을 다니시며 마시는 술에 비례하여 단골 층이 더 두터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사장님은 회를 뜨시다가도 장갑을 벗어던지고 허둥지둥 테이블로 많이도 나가셨다.
나는 당시에 여성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냥 ‘애 티’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 여전히 만두 같은 아이였기 때문에, 손님들도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셨다.
내게 술을 권하시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의 딸처럼 예쁘다고, 또 기특하다고 만원, 오만 원 팁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사장님께 바로 말씀드리고 드리려 했지만, 식당 이모님이 눈치껏 챙기는 거라는 팁을 주셔서 그다음부터는 “감사합니다” 하고 (대신 양심상 사장님께서 눈치껏 알아들으실 수 있는 성량으로) 챙겼다. 분식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팁이었다.
그런데 이런 팁보다도 진짜 알짜배기 팁은 주방에 계셨던 이모가 주신 인생 꿀팁이다. 이모는 주문이 밀려올 때면 작디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카리스마가 나오는지 정말 숑숑팡팡 마술을 부리듯이,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음식을 뚝딱 만들고 쟁반에 올리셨다.
그리곤 손님이 없을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책을 피셨다. 주방에 이모와 둘이 있을 때면, 이모는 흔히 하는 사장님 험담(만두집에서는 사장님의 귀가 많이 따가웠을 거라 생각한다.)은 전혀 입에도 담지 않으시고,
바로 조경 자격증 책을 펴서 볼펜으로 슥슥그어 공부하며 자신의 것을 담아가셨다.
나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도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감동적인 깨달음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계획했던 아르바이트 종목과는 전혀 다른 서빙의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사실 처음에는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도 공부를 그래도 좀 했는데, 대학이름만으로 내가 과외 알바를 도전조차 못한다는 것이 조금은 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때의 몸으로 배운 인생의 작은 경험 조각들은 정말 느닷없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회식자리에서의 숟가락이나 음식을 전달받아 놓는 센스라든지, 횟집 사장님의 사회생활 처술이라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불평하거나 한탄할 시간에 어떠한 환경에서든 틈틈이 자신을 위해 할 일을 해내고 준비하시는 이모님의 모습이라든지.
마치 퍼즐의 가장자리의 조각을 찾으면 맞추기가 수월하듯이, 인생이라는 퍼즐에서, 적재적소의 순간에 나타나 짠 하고 내게 힌트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꽤나 재밌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반전 경험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베트남에서 유학하면서 했던 아르바이트이다.
베트남에서 공부를 하며, 1년 반 만에 통역 아르바이트를 다니기 시작했다. 통역으로 자주 하던 무역상 담은 항상 호텔에서 열렸는데, 나는 깔끔하다 못해 하도 닦아 빛이 나는 곳에 앉아 상담 통역을 했고, 밖에 나가면 호텔에서 제공해 주는 티와 간식들이 호화스럽게 있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아주 우아하게, 또 내가 잘하는 일로 즐겁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역이 며칠 이어지는 날로 잡힐 때면, 친구들이 과외알바로 몇 달은 벌어야 할 돈을 나는 일주일도 안되어 벌고 있었다. 물론 며칠씩 이어지는 통역출장이 때로는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손가락 발가락 퉁퉁 부어가며 했던 서빙 알바에 비하면 또 너무나 감사한 것이었다.
어떠한 큰 실패가 와도, 내가 크게 좌절하지 않고 또 금방 달릴 준비를 하는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패로 보이는 것들이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배움을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금 당장의 이득이 없을지라도, 삶의 다양한 우연이 만나 기회로 연결되어 내게 선물처럼 나타나 줄 수도 있다는 걸... 내 경험의 조각들이 말해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