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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02. 2023

부모님의 이혼. 그렇게 아픈게 아닐 수도 있겠다.

[윤캔디의 성장 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스물 두살. 베트남에 있던 나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오토바이 택시인 쎄옴을 타고 멀리 있는 영어 학원을 다녔다. 스콜성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이면, 쎄옴 아저씨들이 가지고 다니는 헬멧이 젖어 빨래가 덜 말라서 나는 듯한 꿉꿉한 냄새가 올라오고, 베트남의 교통 혼잡까지 더해져 의도치 않게 아저씨의 허리를 꽉 잡아야만 하는 이중의 고를 겪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학원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자유로움을 사랑했기에 부지런히도 다녔다.  블루 아이즈에 옐로우 헤어를 가진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있는 우리는 모두가 뉴욕 어딘가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그 감흥을 이어가려 뉴욕의 어느 까페, 아, 아니 호치민의 어느 까페에서 못다한 영어를 이어가기 바빴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말에 지낸 이야기들을 한 명씩 일어나서 이야기를 하던 중, 열 일곱의 한 친구가 “나는 어제 새 아빠랑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어. 우리 엄마 아빠는 이혼하셨거든. ...” 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턱을 괴고 무심하게 듣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그녀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읽고 있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부모님의 이혼을 이야기하는 그 친구의 표정은 마치 새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는 것마냥 세상 밝고 경쾌했으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앉아 있는 우리도.. 아니, ‘나’는 빼야 했으므로 나를 제외한 다른 베트남 친구들도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들어주고 있었다. 학원에서의 그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 친구가 솔직할 수 있도록 끌어주었는지, 혹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더 쿨한 느낌으로 다가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친구의 경쾌한 음성, 반에서의 공기는 내게 생경하면서도 조금은 부러운기억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이때의 기억으로 나도 조금씩은 변해가기로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당당하지 못할게 뭐있어. 쿨해지자 선애야!’


 나도 실은 이혼가정의 자녀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내적으로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부모님의 이혼이야기는, 꺼내기 싫은 어떤 나의 치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흠이 될 것 같아, 혹은 나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볼 것만 같아서, 혹은 동정의 눈빛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아서 꽁꽁 숨겨놓고 조금이라도 새어나오지 않게 단단히 여미며 살았다.  



 꽁꽁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쿨한척하고 조금 풀어보자면, 나의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입학 준비를 할 때쯤 이혼을 결심하셨다.

 사춘기 열 다섯 살. 그저 친구들이 제일 좋은 나이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친구들과 만나면 컴퓨터에 있는 캠 카메라로 히히덕 거리며 움직이는 사진을 찍고, 비밀 교환 일기장을 나누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빙수 이야기부터, 사고싶은 옷 이야기,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야기까지.. 나는 집에서는 워낙 말 수가 없는, 혼자서 알아서 뭐든 잘하는 맏딸이었지만, 친구들만 만나면 신이나서 재잘재잘되고 유쾌해지고 또 때론 덤벙대는 면이 많아 친구들이 챙겨줄 때가 많은  그런 아이였다. 나는 어쩌면 집에서 지고 있는 무거운 공기와 첫째로서의 부담감을, 밖에서는 아이처럼 훌훌 벗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때 나에게는 친구가 나의 우주인것만 같았고, 그렇게 친구들과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야기를 나누며 여느 사춘기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그렇게 평범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친구들의 비밀들은 마음에 가득 채우며 함께 고민하고 아파했지만, 정작 우리집에는 어떤 비밀들로 채워지고 있었는지, 당신들의 마음은 어떤 아픔으로 채워지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못했는데. 그랬기에 갑작스럽게 부모님의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다, 현실로 다가올 때에는 마치 내 몸의 일부였던 팔, 다리가 갑자기 잘려서 없어져버린.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일상을 살아야하는.. 그런 상황인것처럼 내게 느껴졌다.


 물론, 예전부터 사이가 좋으신 두 분은 아니었다. 글로도 꺼내기 어려운 만큼, 눈물로 짓무른 기억들이 참 많지만.. 혹시라도 내가 쓴 글자들이 두 분을 욕되게 보일까 싶어 적지 못하는 사연들이, 어렸을 적 남겨진.. 아리고 아린 잔상들이 많다.


 그러나 나와 동생이 조금씩 크고 부터는, 동네를 시끄럽게 한다거나.. 나와 동생이 부둥켜 운다거나, 아빠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은.. 그런 장면들은 더 이상 우리집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집도 ‘평범’한 가족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족끼리 웃으며 함께하는 식사는 없을지라도. 그냥 집에 큰 소리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또 예전의 날들에 비하면 우리집은 꽤나 괜찮아졌다고. 그렇게 착각했다. 그리고 여느 자식이 다 그러하듯 엄마와 아빠는 평생 쌍쌍바처럼 붙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갈라진 쌍쌍바를 두고,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되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던가?


 여섯살 차이가 나는 동생은, 당연히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나이였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살기로 했다. 그리고 몸도, 머리도 더 크다는 이유로, 나에게는 참으로 무거운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막상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니 두 분에 대한 원망 보다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만 두 분이 덜 힘드실까? 에 대한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것은 장녀의 숙명인걸까.


 ‘왠지 나까지 엄마한테 가버리면, 아빠의 인생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그냥 아빠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물론 정서적으로는 엄마와 더 가까운게 많았지만, 그냥 그 때는 내가 아빠 옆에 있어줘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도 내가 꽤나 보살핌이 필요한 겨우 열다섯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열 다섯살 정도면 성숙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흔히 사춘기 아이들이 ‘나도 이제 다 컸다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다 큰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이 정도 상황은 ‘다 큰’ 소녀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약해지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어찌하여 나는 한 부모 가정의, 아빠와 함께사는 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재첩국은 입에도 대지 않는데, 아빠와 둘이 살며 냉장고 속 가득채웠던.. 마트에 파는 포장된 재첩국은 아빠와 내가 늘 먹던 메뉴였다. 당시 여느 아빠들처럼, 아빠는 살림과 요리에 서툴렀고, 다 커버린 딸과의 어색한 대화는 공부와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기자이셨던 아빠는 일로 늦는 날이 잦았는데 야자를 끝내고 집에 들어오면 캄캄한 집이 무서워 신발을 제대로 놓지도 못하고, 휙 벗어 던지고 얼른 스위치부터 찾아 집의 모든 등들을 켰다. 어둠속에 덩그라니 혼자 있는 것도 무서웠지만, 그 어둠이 나를 먹어버릴까봐서. 어두운 사람이 되어버릴까봐서. 그렇게 나는 형광등을 켜며 밝음의 기운을 받아보려 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의 나는 정말 밝고 유쾌한 아이였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늘 밝고 싶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않울어’ 하는 캔디처럼. 나서서 반장도 하고, 친구들이 힘들어하면 성대모사를 해주기도, 친구들 앞에서 춤도 추어주며. 내 안의 슬픔이 밖으로 흘러 나오지 않길 바랐다.



 가끔 나는 열다섯, 열 여섯의 나를 보면.. 그 시간들을 엇나가지 않고 잘 견뎌내주어서 고맙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참 애처로울 때가 많다. 마음의 상처와 슬픔을 충분히 어루만져주지 못한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안되는 것처럼 꽁꽁 숨기고 감싸두기만 했던 나. 그랬던 나였기에, 조금은 가볍게 부모님의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그때의 나’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그 친구가 내게는 대견하기도 하고, 이 친구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과 그 솔직함이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스물 두살의 나는 여전히 남들 한테 절대 들켜서는 안될 비밀인 것 마냥 꽁꽁 숨기고, 화목한 집에서 티끌하나 없이 자란 사람의 ‘느낌’을 내며 살고 있는 ‘어른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정작 그 아픔을 ‘어둠’으로, ‘숨겨야 할것’으로 정의한 건 나 자신이 아니던가.



  열일곱 베트남 친구의 당당한 ‘부모님 이혼커밍아웃’ 사건 이후로, 나 역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는데.  누군가에게 일부러 말을 하진 않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가거나 하면 더 이상 숨지 않는 내가 되었다.

 사실 상처는 안에 깊이 묻어 둘수록 더 깊어진다는 걸, 이렇게 꺼내어 바깥 공기를 쐬면 서서히 아무는건데. 나는 왜 그렇게 깊이 묻어두려고만, 보이지 않으려고만 했을까.


 그렇게 열다섯살의 어린 소녀의 상처는, 베트남의 뜨거운 햇볕과 함께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 여섯의 숙녀가 된 나는.. 어느 날 재수학원에서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친구들에게 제2외국어 강의를 하게 된다. 학원에서 20대 선생님이 나뿐이여서 아이들이 내적 친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저마다의 고민을 가지고 수업시간이 끝나고 나를 찾아오거나 쪽지를 건낼 때가 참 많았다.

 특히나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나의 어릴 적 겪어왔던 이 아픔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되어준 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상처, 그 슬픔의 덩어리. 너무 안에 숨기며, 혼자 짊어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니,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그렇게 그들에게 해주는 말은, 위로 받지 못한 어린 날의 나에게 해주는 위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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