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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Jan 14. 2020

엄마의 두 번째 봄

딱 1년 전, 귀촌을 꿈꾸시며 외할머니댁 옆으로 이사를 한 부모님께 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올해 겨울은 눈도 한파도 없이 슬그머니 따스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채비하는 것 같다.

집을 준비하고, 정원을 준비하고, 삼촌을 도와 허드렛일을 좀 하고, 몇 번의 마을회관 행사를 치르고 나니 꼬박 일 년이 흘러버렸다.

그 사이 지역 방송국에서 깨끗한 마을이라며 촬영도 해가고,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를 만나 식사를 함께한 경험도 생겼다.

엄마는 엄마의 키보다도 작았던 뽀빠이 아저씨 옆에 붙어 활짝  웃는 얼굴을 한 사진을 내게 보내주었다.

 



얼마 안 가 엄마는 시골에만 있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며 요양자 자격증을 공부하러 학원에 다녔다.

놀기만 좋아하던 아빠는 시골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찰떡궁합이라 낚시나 기타를 즐기다가 엄마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학원에 출근시켜줬다.

꼬박 두어 달을 주말 빼고 매일 학원에서 8시간씩 수업과 실습을 하고 자격증을 땄다.

책을 보지 않았던 엄마는 글자를 집중해서 읽어내리는 것도 어려워했지만 시험 준비를 위해 외우기보다는 몇 번씩 공들여 읽기를 선택했다.



비가 와도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다며 우비를 입고 정원의 소나무를 정리한다.

어차피 비 오고 흙이 쓸려내려가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텐데 헛짓을 한다고 아빠가 핀잔을 주건 말건 엄마는 엄마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작년 겨울을 빼고는 엄마가 머문 정원에는 수십 가지의 꽃들이 채워져 있었다.

매일을 쪼그려 앉아 심고, 나르고, 잡초를 뽑아 정리하던 엄마만의 정원이었다.

농촌은 겨울에 가장 할 일이 없는 터라 콩이라도 까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려웠다.

심심해서 마을회관에 몇 번 놀러 가긴 했지만, 63세의 엄마가 가장 어려 동전 따먹기를 하는 윷놀이판 뒤에 앉아 80세가 넘은 할머니들에게 믹스커피를 대접하거나 식사를 차리는 일들만 하다 오는 게 싫어 마을의 행사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

이미 93세 외할머니의 삼시 세끼를 집에서 기계처럼 차리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갔다.



몇 번 요양사 자리를 문자로 받긴 했지만 엄마가 살고 있는 깡촌과는 달리 시에서 가까운 시골에 일자리가 많았다.

엄마는 짜증이 났다가, 내심 엄마가 일하길 바라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성질을 냈다가, 일하지 말까 하는 안주함도 들었다.

그러다 긴긴 겨울이 너무 지루해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처음에는 말렸다.

위험하기도 하고, 운전을 얼마나 할까 싶어서.

면허책을 이틀 공부하고 86점으로 실기를 땄다.

그리고 주차에서 한번 낙점한 후, 일주일 뒤 도로주행까지 성공했다.

어제도 엄마는 낮 술을 한 아빠를 태우고 40분 거리에 위치한 해수욕장을 다녀왔다.

이로써 아빠는 더 놀게 될게 뻔하고, 엄마는 또 열심히 생활할게 뻔하다.



엄마는 내가 보내준 류시하의 시집을 저녁마다 읽고,

가끔 필사를 하며,

알파벳을 공부하기 위해 소문자를 그린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빠는 내가 알고 있는지 모르고 내게 매일 전화해 생중계를 해준다.



시골의 산 중턱에 작은 법당이 있다.

아주 오래전 동네에 새로 시집 온 며느리가 신내림을 받아 낳은 딸을 데리고 차린 법당이었다.

작년 가을쯤, 엄마는 아빠와 그 산에 오르다가 잠시 들렀다.

외 할머니의 딸인걸 알고 들어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빠 손을 잡고 하는 말씀이,

마누라 때문에 먹고 산다는 것이었다.

엄마에게는 자식들에게도 큰 기대 말고, 스스로 먹고살아야 한다고 했다. 평생.

평생 밥하고, 평생 일했는데, 다시 평생이라는 말을 듣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적하고 시야가 넓은 시골길 위를 엄마는 오늘도 달린다.

아직 턴이 약하다는 아빠의 말은 무시하고, 앞과 옆의 사물들을 순발력으로 관찰하며 액셀을 밟는다.

꽉 잡은 핸들에서 오기가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은 속도를 낼 때마다 움직인다.

아직 60km를 최고 속도로 달리지만 엄마는 얼마 안가 속도를 키울게 뻔하다.

트로트를 틀고 손가락 반주를 하며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를 엄마의 모습을 상상한다.

엄마는 두 번째 봄을 즐기고 있었다.





@byphap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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