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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phapha May 22. 2023

장례 선물

외할머니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

"할머니 돌아가셨어"


급한 용무가 아니면 엄마는 자식들에게 전화하지 않는 편이다.

자식들의 근황은 시시 때때로 전화하는 아빠를 통해 전해 듣거나 알아서 잘 살려니 하는 마음으로 안전한 거리를 두는 엄마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휴대폰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허둥지둥 고무장갑을 뒤집어 빼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귀촌한 이후 집을 고치거나 정원을 예쁘게 꾸미고, 마을회관에서 주최하는 뜨개질이나 난타등에 참여하며 나름 조용한 시골에서 바쁘게 적응하며 살았다. 그러다 작년부터 1년 6개월이 넘게 치매와 걷지 못하는 아흔다섯 살의 노모의 간병을 맡고 있었다.

그나마 옆집에 사는 이모가 있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각자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하루 두세 집을 들르기 위해 운전을 하는 일상이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2주 전쯤 어버이날을 맞아 처음으로 혼자 우리 집에 기차를 타고 올라온 엄마는 도시는 답답해도 할머니 생각 안 하니까 너무 좋다며 그간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에게 푸념하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오전에 다른 집의 간병을 마치고 할머니의 집에 들어간 엄마는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의 정체를 찾기 위해 거실과 화장실을 다니며 코를 움직였다.

이윽고 할머니 방문을 열자 그 냄새는 더 역하게 엄마의 호흡 안으로 빨려 들어왔고 눈동자가 멈춘 자리에는 숯칠을 해 놓은 것처럼 검게 변한 할머니의 손바닥이 있었다. 여기저기 검게 칠해져 있던 벽, 검은 알갱이들로 덮여있는 이불 위를 보자 그제야 집안의 냄새와 검은 칠이 할머니의 변이라는 것을 알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이게 뭐야! 왜 똥을 발라놨느냐고. 도대체 이게 뭐냐고!"

우악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야기하던 엄마는 방안에 가득한 냄새를 빼기 위해 급한 대로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와 예닐곱 번 할머니의 손을 닦아주었다.

잔 주름을 따라 새겨진 똥의 흔적은 점차 지워지는 듯했으나 냄새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불빨래와 할머니 뒤처리까지 마친 엄마는 약한 비위가 그간 단련된 것도 잊은 채 헛구역질을 하며 그날 저녁을 먹지 못했다.


넘어져 걷지 못한 상태로 지내게 된 할머니의 기저귀를 가는 일은 아담한 체구를 가진 엄마가 혼자서 해내기에는 버거웠다. 손목은 아파왔고, 어깨는 한쪽으로 더 기울어져갔다.

이모와 각자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는 오전과 낮에 시간을 분배해 할머니를 돌보았고, 주말에는 이모와 함께 할머니에게 갔다.

엄마가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소화기능이 떨어지고 하체에 힘이 없던 할머니의 변비를 걱정해 장갑 낀 손으로 변을 끄집어내는 과정이었는데 한동안 그 생각에 밥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이모와 수다를 떨며 마스크를 끼지 않고도 할머니의 뒤처리를 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 사건이 있고 며칠 뒤 주말에 이모와 할머니에게 내려간 엄마는 다시 한번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고 하기엔 방안은 지난번 보다 더 심각했다.

당황한 이모는 엄마가 그랬듯 그 상황을 눈으로 쫓아가다 그대로 멈춰서 있었고, 엄마는 이번에는  더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며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밖에서 정원을 가꾸던 삼촌이 놀라 뛰어 들어왔다.

“야! 엄마 좀 봐 봐.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또 이렇게 해놨어. 이게 뭐야. 자꾸 반복되면 난 더 이상 못 해. 요양원으로 보내던지 해야지. 나도 더 이상은 못해. 이게 뭐냐고! “


9남매 중 둘을 잃고 7남매를 키우던 할머니는 아들과 첫째, 막내딸을 제외하고는 곁을 두지 않으셨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골고루 나눠주지 못했던 형편은 물론이고, 정서적인 교감을 해본 기억도 거의 없을 것이라는 걸 나도 내 아이를 낳아보니 알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엄마는 나에게 할머니를 돌봐드린 건 본인인데 병원에 찾아온 다른 자식들만 알아본다며 다 소용없다는 말을 했다.


어버이날 나는 엄마를 불러 기분 전환 겸 쇼핑을 했다.

회전초밥, 카페커피, 쌀국수까지 엄마가 평소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먹고 공원에 가서 산책하며 엄마와 실컷 수다를 떨었다.

엄마는 할머니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와 있으니 숨통이 좀 트인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정확히 2주 후에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엄마의 그 한마디가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죽음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픔보다 할머니로부터 해방된 엄마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엄마에게도 할머니는 사실만큼 사셨고, 엄마도 충분히 잘해드렸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이미 다 울고 기운이 빠져버린 엄마와 이모들의 축 늘어진 얼굴들이 보였다.

마치 바닥이나 의자에 그 모양 그대로 붙어버린 어느 책 속 그림자의 혼령 같았다.

발인하기 전까지 멈춰있던 눈물들은 화장터로 가는 차에서 시작해 화장하는 동안 기다린 대기실 안에서도 이어졌다.

화장 시작을 알리는 커튼이 내려오자 엄마와 이모들은 울부짖었다.

분명 그건 우는 게 아니라 울부짖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엄마 뜨거워요. 안돼 엄마!”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엄마와 이모들은 유리창에 매달려 한 줌의 가루가 되어버릴 할머니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펄펄 뛰며 울었다.

그녀들이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골함을 받아 들고, 할머니댁으로 다시 돌아온 가족들은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고 생전 당신이 좋아하던 시골의 길목, 화단, 그리고 집안까지 돌며 마지막으로 살아계실 적의 모습을 보여드렸다.

평소 눈물이 없던 엄마는 할머니의 영정사진 뒤를 따라 걷다가 두 번이나 주저앉아 실신을 했다.

아이고. 엄마. 엄마. 우리 엄마.

그리고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우리 엄마.

그 순간 언젠가는 죽음 앞에서 똑같은 의식을 밟게 될 우리 엄마와 이모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장례를 치른 뒤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나 엄마의 기분이 어두워지면 어쩌나 조바심을 냈지만, 괜찮아 보였다.

아흔다섯 살이나 된 할머니의 죽음이 호사라고 생각하면 욕심일까.

할머니의 죽음보다 엄마의 해방을 기뻐하는 나는 나쁜 걸까.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처럼 절규하던 엄마의 그 모습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에게 소리치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엄마인데, 할머니를 벗어나니 숨통이 트인다고 했던 그 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고된 죽음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갖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지만 생을 끝까지 살아내려고 했고, 그런 노모의 마지막을 책임지려고 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인해 나는 가족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다짐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듯이, 나에게도 엄마가 있으니까 말이다.





#장례식 #가족에세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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