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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Jan 02. 2023

강화 해 지는 마을길에서..

- 강화학파의 맥을 찾아 영재 이건창, 하곡 정제두 묘소를 둘러보며...


이 글의 시작은 지난 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5월 중순께, 연 초 야심 차게 예약해 두었던 북스테이를 했다. 강화도의 변방, 온수리의 작은 독립서점 '책방 시점'에서.


북스테이 체크인 전 강화 온수리 주변을 둘러보다가 숙소에 짐을 풀고 무작정 서해바다의 노을이 보고 싶어져 바다 쪽을 향해 나섰다. 숙소에서 가까운 동막해변 쪽 분오리 돈대로 이동하던 중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영재 이건창 묘소를 찾아 급히 방향을 돌렸다. 내비게이션과 네이버 지도도 잘 못 찾아 주는 선생의 묘를 간신히 찾았을 때의 쾌감이 새삼 떠오른다.   



강화 섬 서쪽의 건평 항구 쪽에서 오른쪽으로 2차선 도로를 따라 들어가라는 팻말이 나온다. 여기서 나지막한 언덕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건평리 마을회관, 이 마을회관 맞은편으로 이어지는 마을길로 들어서야 한다.    



다시 위치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동안 오래된 마을의 정감 있는 모습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 오른쪽 언덕 쪽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 듯한데...    




강화 나들길 4코스도 이 길이다.

이 길의 이름은 '해지는 마을 길'.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에서 시작해 영재 이건창 선생의 묘까지 이어지는 길.

한 번 꼭 걸어보고 싶다.    



교회 마당 맞은편 좁은 길로 올라가다 보면 선생의 묘가 있다.    




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일이 사뭇 경건하게 여겨진다.    






그 흔한 상석 하나 없는 선생의 묘소가 너무나도 선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이렇게 벌초를 단정하게 해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을 머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묏자리까지도 어쩜 이렇게 그분의 삶을 닮았을까??    



선생의 묘 주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또 멍하니 서있다가 조용히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던 중 뒤를 돌아보니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서해의 지는 해를 보기 위해 이 곳을 찾아들었을 수많은 선비들..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마을회관 어귀에서 다시 돌아 본 선생의 묘소 쪽.

지금은 양명학과 강화학파의 명맥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1893년 봄, 조선의 뛰어난 문장가요 지조 있는 관리로 명망이 높던 영재 이건창이 전남 보성으로 귀양을 떠나던 날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 남대문 밖 길목에 주안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파루를 알리는 쇠북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성문이 열리면서 걸어 나오는 죄인과 호송관을 멈추게 한 뒤, 이건창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 『강화학 최초의 광경』 중에서, 개화파의 갈등으로 귀양을 떠나게 된 이건창을 새벽길에서 맞은 것은 보재 이상설이었다.


보재 이상설은 훗날 독립운동가로서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강화학이라 불리는 양명학이 구한말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중심의 한 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일례라 여겨진다.      

   





양명학을 신봉했던 하곡 정제두 선생은 당쟁이 격화되던 숙종 말년 표연히 서울을 떠나 이곳 노을 지는 강화도 하일리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하곡이 강화로 낙향하고 난 후에 인척과 제자들 그리고 지인들이 다수 강화로 들어가게 된다.


양명학, 다소 생소하게 들린다. '지행합일'을 주요 덕목으로 여긴 학문이기에 실사구시의 대응 방식으로 후세에 큰 영양을 미친 학파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무튼, 지난 해 봄 이건창 묘를 둘러본 이후 숙제처럼 따라다니던 생각을 해결하고자

지난 추석 친정인 김포에 갔다가 부모님 모시고 잠시 바람 쏘이러 가까운 강화도를 다녀오며

나의 사심을 드러내어 이곳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에 다녀왔다.    






도로와 인접해 있는 묘소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사진만 찍고 오겠다 하니

친정 부모님이 많이 의아해하시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아~니, 도대체 누구길래 일부러 여기까지 온다는 거야?"


"응, 그냥.. 제가 존경하는 조선시대 학자의 묘소인데, 꼭 한번 와보고 싶어서요.."






이건창 선생의 묘소보다 웅장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강화에 연고가 있던 하곡 집안의 역사를 알고 나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밀린 숙제처럼 두 분의 묘소를 둘러보고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이분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 사태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 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 강화학파의 맥을 이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해방 직후 연희 대학에서 가진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의 환영식에서 소개한 중국 한나라 장건의 시




이 시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강화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강화로 찾아든 학자 문인들이 하일리의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황하의 긴 잠류였으며, 일몰에서 일출을 읽는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으리라 생각한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았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통해 만난 '떨리는 지남철'이라는 시.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인 '양심적인 사람'의 세계관을 잘 담고 있는 시를 옮겨 적으며 때 지난 숙제를 마무리해야 겠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서여 민영규, 『예루살렘 입성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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