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2022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 / 안갯속에 눈을 떠라 / 눈물을 감춰라
- 정훈희, '안개'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중략)...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 '무진기행'
"완전 안전한 원전"이 붕괴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원전은 "완전 안전하게" 짓는다. 너무도 위험해서 너무도 안전하게 짓는 원전. 남녀 사이도 너무나 불안정해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게끔 여러 겹 장치를 마련해둔다. 해준과 정안이 의무감에 갖는 잠자리, 석류며 자라며 모두 그런 안전장치의 일종이다. 우리는 안전장치를 보면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안전'을 확보했다 느낀다.
다만 이포의 안개처럼, 무진의 안개처럼.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도 가시지 않는 안개에 가려 우리는 모래성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챈 만조에 당황할 뿐이다. “완전 안전”한 줄 알았던 부부관계도, 직업의식도 들이닥치는 파도에 휩쓸려 손쓸 시간이 없다.
안개가 낀 곳에서는 당최 무어를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다. 무너져내리는 것들을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눈을 가로막는 안갯속에서는 서로의 말에 더욱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나 죽은 남편의 상태를 말로 설명 듣기보다 눈으로 보기 원했던 서래, 그리고 이런 서래의 모습을 두고 자신과 비슷하다 말하는 해준. 모두들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공연히 무언가 식별하려 애쓰는 중이다.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해파리처럼, “눈코입”이 없다고 말하는 해파리처럼,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은 응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는 편이 오히려 안전하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 착각하는 와중에,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안전장치는 실시간으로 '붕괴'되는 중이다.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도수의 눈, 하늘을 바라보는 생선의 눈깔, 연신 인공눈물을 넣어대는 해준의 눈은 닮아 있다. 해준의 눈은 아직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세 쌍의 눈은 몽타주로 연결되어 있다. 기도수의 눈은 산의 눈이다. 생선의 눈은 바다의 눈이다. 해준의 눈은 육지의 눈이다. 그런데 산의 눈도, 바다의 눈도 모두 시체의 일부분으로 등장한다.
집요하게 '눈'과 '시각'을 관점으로 영화를 해석한다면, 박찬욱이 기도수의 시체와 생선 사체를 보여주었다기보다, 시체-눈을 연속하여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해준은 앞선 두 쌍의 눈과 달리 '살아 있는 몸의 기관으로서 눈'을 사용하고 있다고 영화를 오독할 수 있다.
해준은 아직 살아있으니 해준의 눈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두 시체의 눈(시체-눈)을 보여주면서 눈과 시각의 무용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포에 오면서부터 해준은 인공눈물을 달고 산다. 안개가 가득한 이포에서 인공눈물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일까? 인공눈물을 넣어도 넣어도 해준은 자신의 직업윤리, 가정이 무너지는 과정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부하 형사 수완(고경표 분)이 난장판이 된 서래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자는 것을 해준이 깨우는데, 난장판이 된 집을 '본' 해준의 생각과 달리 실상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서래였다.
영화는 내내 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보지 못한 것과 봤다고 착각하는 것 사이에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클라이맥스로 나아간다. 자신이 서래를 사랑하고 있음을, 서래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뒤늦게야 깨달은 채(그것도 서래의 '녹음파일' 즉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통해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
커튼 뒤 보이지 않는 공간에 미제 사건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듯이, 우리도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해준이 영화 초반 수완에게 말하듯, '쉬운 말'로 설명하면 해결되지 못할 것이 없다. 말하고, 들어야 파도가 밀려들기 전에, 만조가 되어 때가 늦기 전에 우리는 진실을 구성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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