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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Feb 26. 2023

물고기는 없지만(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이 글에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202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추천을 거듭하여 읽게 된 책이다. 에세이면서도, 과학 교양서이기도 하고, 평전(評傳) 같기도 하다. 줄거리는 과학 칼럼니스트 룰루 밀러가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조던 스타의 삶을 조망하는 내용이다. 스포일러 경고를 무시하고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을 위해 말하자면, 실상 "어류"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책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다면, 물고기만 분류하며 평생을 바친 데이비드의 삶이 허망하게까지 느껴진다.


물론 데이비드 조던 스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고기를 채집할 당시에는,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생명의 사다리(꼭대기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앉아 있을 것이다)"가 존재한다 믿으며, 더 나은 생명체와 퇴락한 생명체가 있다는 스스로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물고기 분류에 힘써왔다. 그의 신념은 물고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월한 종(種)과 비참한 종이 있다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끝내 우생학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데이비드가 꽂혀 있던 생명의 사다리


저자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행해졌던 강제 불임수술을 묘사하며, 데이비드뿐만 아닌 당대 유수 과학자들이 "생명의 사다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다리"가 있다고 믿으며 자행하였던 우생학 연구들을 소개한다. 우생학자들은 "우수 인간으로서, 인위적으로라도 우리가 낳고 길러야 할" 우생학적 모범 인간형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형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위험한 개체로 "분류"하였다. 몇몇 과학자들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비해 미국의 우생학 혁명이 뒤쳐지고 있다며 우려하기까지 하였다.


이제서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물고기라는 범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과 같이, "우수한 인간"과 "도태되어야 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물고기라는 범주가 나에게서 사라진 것처럼, 내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적 범주(고정관념)는 무엇일지" 고민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추진력과 행동력까지 갖춘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조던 스타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준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이 책을 읽고 물고기와 "삶의 목표" 사이에 등호를 만들기도 한다. 데이비드가 평생 쫓아다녔던 물고기가 실상 존재하지 않았듯이, "나"의 삶의 목표(가령 서울에 내 집 마련 등)도 결국 물고기 같은 허상 아닐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결국 서울에 내 집 마련도, 좋은 차 사는 것도, 좋은 배우자 만나는 것도, 자격증 합격도 모두 물고기 아닐까?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한다는 건 다 물고기 잡기 아닌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러한 결론은 룰루 밀러가 이 책을 쓴 의도와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데이비드가 평생 물고기를 쫓아다녔듯, 누군가는 물고기 즉 어류라는 분류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물고기를 쫓아다녔다. 룰루 밀러가 언급하였듯, 어류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것 역시 분류학자들이었다. 수많은 물고기를 해부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물고기를 보지 않고서는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지 못하듯이, 물고기에 미친 사람(데이비드)이 있었다면 그 반대에서 물고기에 미친 사람도 있던 것이다(윤계숙). 그러니까, 이 책을 그 무슨 3류 힐링서적처럼 읽어버린다면 자못 애석한 일이다. 언제나 인간의 노력은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다.


저자가 진정 말하고 싶던 것은 무엇일까. 세상 인간들이 각자 마음 깊이 추구하는 것들이 모두 물고기라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라는 범주, 존재하지도 않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개체의 각별성은 존중되지 않고 단순히 그 종으로 치환되던 위험한 사고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매춘부의 딸이었던 에마 벅이 그저 그 이유만으로 불임수술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그러한 위험한 사고를 할 수 있으므로, 타인의 지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불임수술의 희생양이 된 캐리 벅, 사진출처 EBS


우생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토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정작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돌연변이의 위대함을 찬양하였다. 20세기 초 상당수 지식인들은 우생학자들의 허황된 주장에 대해 다름 아닌 '종의 기원'으로 반박하였다. 이를테면 신천지 신도들의 논리를 다시 성경으로 반박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생학자들은, 특히 데이비드 조던은 그러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꿋꿋이 물고기와 우생학, 생명의 사다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하는 불행이 야기되었다.




결국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게 아닐까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사다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고기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 반대편의 증거들을 모두 기각한 결과, 전미에서 6만 건의 불임수술이 행해지게 되었다. 우리 사는 2023년의 물고기는 무엇일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반대편의 목소리는 무엇이 있을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언어 속에만 존재하는 범주들은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책을 오독하여 세상의 공고한 테제 반대편에서 "물고기"에 집착하며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묵묵히 증명해 내는 숭고한 "노력"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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