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권에서 종종 쓰이는 관용 표현 중 하나가 '백조의 노래'다. 우리나라 인터넷 문화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라스트 댄스'가 될 테고, 조금 더 지긋하게 표현하자면 '꺼지기 전 크게 타오르는 촛불'이 되겠다.
백조는 본래 소리를 내지 못한다. 거위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종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디폴트다. 그런데, 죽기 직전에 목소리를 낸단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목소리로 딱 한 번. 옛날부터 이어진 전설 같은 이야기다.
브랜드 '스와로브스키'로 연상되는 백조의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해 보면, 진짜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얼마 남지 않은 끝이 다가오는 그 순간, 희고 고고한 자태를 놓지 않던 백조가 마지막에 퍼뜨리는 아름다운 소리.
Swan song, 백조의 노래.
'백조의 노래'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죽기 직전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개념은 사실 창작물에서 활용하기 너무 좋은 소재라 그간 많이 활용돼 왔다. 그래서 사실 새로울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나도 종종 접해봤다. 그래서 진부하게 느껴졌다. 소재 자체가 가진 스토리 만으로 창작물의 시작과 끝을 다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기에.
그 영화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추천해 줬다. 흑인이 주인공이고 제목이 백조의 노래인 영화 소개 영상을 봤다. 지금은 30분가량의 짧지 않은 결말까지 보여주는 영상을 끝까지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알게 되었으니까.
영상을 다 본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구독하지 않던 OTT를 영화 관람료라 치자고 생각하고 결제했다. 결말까지 아는 상태에서 다시 본 그 영화는 유튜브 영상에 없던 디테일과 분위기, 뉘앙스가 느껴졌고.. 그날 난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밤을 보냈다. 다음날 휴일이라 다행이었다.
때는 근미래, 복제인간 기술이 거의 완성된 상태의 사회가 극의 배경이다.
기차를 탄 주인공은 운명적인 사랑을 마주친다. 인연이라면 어차피 이어질 운명이라던가. 남의 초콜릿을 뺏어먹는 플러팅 아닌 플러팅은 보는 나로 하여금 저항 없이 "이게 된다고?ㅎ"를 튀어나오게 했지만.. 눈 맞음은 어쩔 수 없단 걸 이제 우리는 안다.
말도 안 되는 플러팅을 던진 주인공은 상대에게서 되려 제대로된 플러팅을 받았고, 곧 두 연인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병에 걸려 곧 죽을 처지에 놓인다. 복제인간 기술을 시연해 볼 대상을 찾던 이들은 주인공에게 제안한다. 주인공이 죽게 되면 똑같은 외모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복제인간이 주인공을 대신해서 살게 될 거라고. 죽게 되면 본인 없이 살게 될 부인과 자식을 걱정한 주인공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건 매우 고독한 제안이었다. 복제인간이 나를 대신할 거라는 사실을 내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 비밀로 해야 했다.
결국 주인공은 죽고, 복제인간이 주인공 대신 살게 된다. 아니, 주인공이 죽고 주인공(1)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 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 결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주인공이 그 과정에서 겪는 것들이다. 곧 죽는 나를 대체할 '나'를 대하는 주인공의 감정. 그리고 가족, 친구, 사회, 직장 등 쌓아온 관계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홀로 정리해야 하는 고독함. 거기서 튀어나오는 억울함과 질투, 염세주의와 주관적 허무주의.
최근 나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에게 술자리에서 '상당히 염세주의적이다'라는 평을 들었다.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적잖이 놀랐다. 아마 티가 났겠지. 그냥 자기 객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게 과했나? 그래. 좀 과하긴 했다. 아니, 그래도 염세주의는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대던 20대 초반을 지나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열정페이, 미래, 진로 이런 사회적인 것들을 겪으며 염세주의 아닌 염세주의가 나도 모르게 뿌리가 박혔는지도 모른다. 말로는 하면 못할 것 없다, 라고 자위해 오면서.
생각해 보면 옛 기억을 아직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도 내 그런 태도를 꼬집는 말을 종종 했었다. 워딩이 날카롭고, 꽤나 아파서 당시에는 못 받아들였지만. 지금도 좋은 사람이긴 한데 그렇게 바뀌면 더 좋을 것 같다며 큰 과제를 넘겨주고 떠난 셈이었다. 아마 오래 걸리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멘탈 최강자 주인공은 어떠한 결론에 맞이한다. 내적 갈등을 초월한 주인공의 뒷모습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백조 그 자체였다.
만약 내가 곧 죽을병에 걸렸고.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나 대신 나를 복제한 '내'가 다를 대신하게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면,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내 사랑하는 동반자가 사실은 기억까지 완벽하게 복제된 복제인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주는 사랑이 나 말고 '내'가 받게 된다면.
그 질투를, 버틸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요즘 날씨에 진한 위스키 따라놓고 보기에 딱인, 그런 무거운 영화.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