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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희 Jun 25. 2019

듣는 귀가 필요해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하원을 하고 나서 미주알 고주알 엄마한테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도 나와 내 동생들은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엄마한테 한다. 대부분이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다. 그냥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조금 위로가 돼서 그런 건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엄마는 항상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다. 몇 번이고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묵묵히 들어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말을 하기 바쁘기에 듣기보단 말하려고 하는데 우리엄마는 대부분 들어주려고 한다. 속상한일이 있어서 엄마한테 내 서운함을 토해내듯이 말을 하면 엄마는 처음에 무조건 우리 편을 들어준다. 그러고 나서는 대화 끝에는 항상 그 사람도 그랬을 이유가 있었을 거야, 라는 말로 마무리를 한다. 아니면 왜 그런 상황이 오게 됐을지 한 번 더 물어봐준다. 다시 한 번 더 왜 그런 상황이 왔는지 나에게 되물어 보는 방식이다.

 말을 하다보면 내가 유리한 쪽으로 다 토해내는 경우가 생긴다. 앞뒤 다 빼먹고 내가 느꼈던 감정만을 이야기 하게 된다. 특히 서운했던 일들이 있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 엄마랑 이야기가 끝나면 나 혼자 생각할 시간이 생긴다. 그럼 그때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내 잘못도 있기 마련이다. 지금도 그렇다.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 받는 부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일단 ‘그래 그 사람 참 이상하다’라고 내 기분에 맞춰 준다. 마지막은 항상 예전과 다를 게 없다.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라든지. 아니면 그런 것 즈음 이겨낼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한다. 그러다보면 격해져 있던 내 감정이 차츰 수그러들어진다.

 우리 아이들도 하원을 하는 차 안에서 서로 이야기 하겠다고 난리다. 엄마 오늘은 이랬어 저랬어. 서운한 일이 있었을 때는 차안이 떠나가도록 자기가 화났던 상황 슬펐던 상황을 장황하게 펼쳐둔다. 나는 일단 그랬구나. 그래서 어땠어? 속상했겠다. 라면서 온갖 추임새를 넣어준다. 아이가 점차 진정이 되는 것을 느끼면 그때 물어본다. 그때 행복이 마음이 그래서 너무 속상했지? 그럼 친구 마음은 어땠을 까? 라고 물어보면 아이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다. 차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냥 내비 둔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조용하다. 집에 들어가면 방금 대화한 것들을 다 까먹은 사람 마냥 손 씻고 발 씻고 난 후 신나게 논다.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을 때 혹은 어린이집을 가는 차안에서 뜬금없이 아이의 말문이 열린다. 충분히 그 상황을 곱씹어보고 곱씹어본 후에 내놓는 말은 어른인 내가 배울만한 말들이 많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고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후 한층 더 성숙해진 생각을 나에게 이야기 해준다. 기분을 풀고 어린이집에 신나게 등원을 한다. 하원할 때 아이는 오늘의 또 다른 이야기를 나에게 구연동화 하듯이 털어 놓는다. 전날과 다르게 행복했던 이야기들로 가득 채운체로 이야기 해준다.

 일이 너무 힘든 날은 그냥 조용히 운전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침에 잠깐 엄마 얼굴을 보고 저녁이 돼서야 보는 엄마에게 할 말이 많기도 많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용히 하라고 화를 냈었다. 아이들이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이 보여도 내가 당장 힘들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그러니 점차 아이들이 나에게 말하는 모습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이야기니까 처음부터 하지 않게 되었나 보다. 그런데 참 사람 심보가 못났다. 처음에는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들이 말하지 않으니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하루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고함지르더니 하루는 꼬치꼬치 캐물으니 어찌해야 올바른 것인지 혼란이 왔을 것 같다. 당황스러워하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엄마로서는 더 당황스러웠다. 눈을 맞추고 엄마도 엄마라는 걸 처음 해보는 거라서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는 왜 엄마를 처음 해보는 것인지 부터 딸아이의 ‘궁금 투성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린 덕에 그날은 말을 정말 많이 했다.

 참 희한한 게 친구들이나 주변 지인이 자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심리상담가가 되어서 열심히 들어 주었는데 매일매일 마주하는 가족의 이야기는 무심하게 된다. 항상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더 잘해야 되는데 항상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 이였을까 참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만다. 지금은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려고 하고 있다. 아이들의 이야깃거리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들어주는 모습에 아이들은 점점 자신들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렇게 자존감을 한 단계씩 쌓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들어 주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랬다 저랬다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게 어지간히 힘들었다. 친정엄마가 했던 것처럼 그냥 들어주려는 연습을 무던히도 했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그냥 무조건 인정해주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는 입장은 그냥 잠시 묻어두고 우리아이들의 입장만 생각했다. 우리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기 시작하니 점점 듣는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공감해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잠시 내려두고 그냥 공감해주기만 했을 뿐인데 아이들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듣고 공감하기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간관계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했던 방식대로 해나가니 요즘 나는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지고 있다. 내 욕심 내 관점만 주구장창 이야기 했던 때와는 다르게 날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마냥 덮어두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들어줄 때에는 누가 됬건 간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면 된다. 어느 정도 상대방의 감정이 진정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충고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된다. 만약 들어주기만 한다면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지나치게 된다. 자신의 말만 옳다는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충고를 함으로 인해서 너 잘났다 라는 식의 반응이 나온다면 나도 한때는 저랬겠구나 하고 넘기자. 나는 우리아이들의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아이들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아이들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나를 속상하게 했던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아이들이 되길 바란다. 들어주되 반대편의 입장도 생각하게끔 유도해준다면 아이들의 듣는 귀는 절로 열린다. 아이들이 조금씩 변하는 중 임을 느끼고 있다.

 

 공룡장난감이 엄청 유행한다고 한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만화가 또 유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아이들에게 내가 무조건적인 선물 공세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집 보다 엄청난 장난감들이 한가득 있다. 감당이 될 정도로 많아서 100L 쓰레기봉투로 두 번이나 버렸다. 그래도 넘쳐나는 것을 보니 나도 참 미련스럽게 살았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정말 다행이다. 서서히 일한다는 죄책감의 산물인 의미 없는 선물 공세를 줄이고 있는 도중에 마트에 갔더니 역시나 장난감 코너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 다 입을 모아 요즘 친구들은 다 저 장난감이 있다면서 누가 봐도 우리아이들이 가지고 놀지 않을 법한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누구는 이게 몇 개나 있네, 여자 친구들도 있는 친구들이 있네, 자신들이 장난감이 필요한 이유를 어쩜 그렇게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는지 안사주면 꼭 죄인이 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조절이 안 되면서 지금 집에 장난감이 몇 개가 있느냐며 다그쳐 물었다. 마지막에 엄마들이 하는 단골멘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와’ 라고 하고 양손을 붙들고 질질 끌고 나왔다. 나는 아이들의 의견을 말할 기회를 묵살시키고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화나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볼 뿐 이였다. 나중에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로서는 항상 사달라면 사줬던 내가 그런 말과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나는 내 기분에 따라 아이들의 말을 해석해버렸고 그 결과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은 결국 공룡장난감을 사주지 않았지만 서로의 기분은 굉장히 상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난감사주기를 목표로 한 칭찬스티커를 다 모아서 장난감 가게에 갔다. 우리 아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룡장난감이 있는 곳으로 갔다. 몇 십 가지의 장난감들 중에서 본인들이 좋아하는 색깔의 공룡을 골랐다. 나는 속으로 가지고 놀지도 않을 거 또 산다고 궁시렁 거렸지만 약속은 약속이기에 공룡장난감을 사주었다. 아이들은 꼭 이날만을 기다려 온 아이들 마냥 차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주 기분 좋은 상태가 쭉 이어졌다. 얼마 가지고 놀지도 않을 거란 생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매일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서 다녔다. 집에 와서도 꺼내서 놀았다. 의미 없이 사주지 않기로 한 것에만 너무 치우쳐서 아이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은 나의 잘못을 꼬집어주듯 아이들은 그 장난감을 너무나도 잘 가지고 놀았다. 왜 그 장난감이 필요한지 구구절절 표시했음에도 혼만 내버린 엄마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우리 집에 너희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많은데 왜 사려고 하니?” “엄마가 왜 너희한테 저 장남감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할까?” 라고 한번이라도 물어봤으면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경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서 나는 또 듣는 연습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봐야 된다. 엄마의 요구사항이나 아이들이 해야 될 것들에 대해서 대화를 한다기보다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수준으로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기분, 내 상황에 따라 상처주는 말을 툭툭 내뱉는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공감을 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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