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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경 Jan 21. 2024

나의 롤은 잼의 관찰자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그러면 나는 이 모든 일에 상관없는 듯 옳은 소리만 내뱉을 수가 없다.



  "근데 그거 따돌리는 거 아냐?"

  "아니지. 내가 걔랑 노는 게 싫은 거지, 다른 애들이랑 못 놀게 하고 그런 거 아닌데."

  "그럼 은따 아니야?"

  "은따도 따돌리려고 마음먹은 거 아냐? 난 아닌데?"

  "응, 뭔지 알겠네. 따돌리려고 하는 마음은 없는데 걔가 친구가 없어지는 게 통쾌하단 말이지?"

  "응, 통쾌는 할 수 있잖아."

  "응, 그렇지."



  그래, 통쾌는 할 수 있지. 그 아이 이야기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방학을 코앞에 둔 학기의 끄트머리에 그 아이는 놀 친구들이 없어졌단다. 이제 반아이들이 그 아이와는 놀려고 하지 않는다고.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못된 행동을 해도 그래도 함께 보듬어 안고 잘 지내야 한다고, 나는 그런 말은 하지 못했다. 나는 그랬나. 지금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쓸데없이 감정 낭비하지 않도록 피하는데, 이제 열 살 조금 넘은 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다. 친구를 싫어도 해보고 싸워보기도 하고 뜬금없이 몇 년 후에 친해지기도 하고 그런 걸 겪어야 할 나이니까. 



  "걔 좋아하던 친구들도 이제 걔 인성 다 알게 되어서 다 안 논다니까. 걔 아이돌 되면 나중에 인성논란 터진다."



  싫어하던 아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는 것,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저 아이가 틀린 게 맞다는 증거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 나도 그랬다. 반에서 대장 노릇하려고 하면서 참견하는 아이를 보면 참지 못했던, 지금의 잼 또래였던 나를 기억한다. 잼은 자기가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아이는 할 말이 없으니 그냥 성질만 내고 가버린다고, 자기 말싸움 좀 잘하는 것 같다고 으쓱한다. 그래, 친구와 말싸움하면서 친구를 울리곤 내가 이겼다고 으쓱했던 나도 기억한다.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그러면 잼은 언제쯤 그런 감정소모가 피곤한 일인지 알게 될까. 부딪혀 소리를 내야만 하는 게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란 걸 언제 알게 될까. 힘들지만 나와 다른 남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언제 알게 될까. (알면서도 여전히 하지 못하는 내가 부모라고 무슨 말로 충고할 수 있을까.) 부모란 이런 걸까. 나와 비슷한 아이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은 알지만 그땐 몰랐던 걸 떠올리면서 아이를 이해하고, 또 그러면서도 나보다는 빨리 깨닫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 나날이 깨닫게 되는 부모의 롤이다. 아이의 삶에 부모는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



  "근데 있잖아. 내가 나이를 먹어보니까 좀 달라지는 게 있더라."

  "뭔데?"

  "싫은 게 많이 없어져. 그렇게까지 열을 내면서까지 싫어하는 게 없어져."

  "그래?"

  "응, 그냥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는 거지. 그리고 뭐 그냥 쟨 그런가 보다 하게 되고. 그래서 좋은 거 같아."

 


  잼은 아직 이런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다. 알쏭달쏭한 표정만 지었다. 그래, 여기까지지. 말 몇 마디로 바뀌는 사람은 없어. 바뀌지 않더라도 잘 가고 있는지 관찰하며 보호하는 나의 롤을 충실히 해내려면 잼의 쫑알거리는 수다가 기본인데 과연 이 쫑알거림이 몇 살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제 닥칠지 모를 미지의 사춘기에도 입만은 열려 있기를 바랄 수밖에. 







잼 : 초등 중학년과 고학년 사이 어드매

엄마 : 잼과 띠동갑.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띠동갑에서 한 바퀴 더 구른 나이에 잼을 낳았지만 잼과의 수준 차이는 한 바퀴를 빼야 한다.




진: UnsplashJean-Louis Au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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