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매달 Jul 20. 2020

이분법적 논리의 폭력성

삐딱이가 바라보는 세상





 이분법적 논리는 우리 사회에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남자/여자, 좌파/우파, 흑/백, 선/악, 삶/죽음, 원인/결과 등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명백한 오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보수적이기도 진보적이기도 하다.(이미 여기에서 진보/보수의 이분법적 개념이 깨진다.)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진보 진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의 투표권을 여당에 던졌다. 그렇다면 나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몸은 살아있으나 어떠한 삶의 욕구가 없다. 정신이 죽어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죽어있는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더 나아가 뇌는 죽었지만 심장은 움직이는 경우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인가? 죽어있는 것인가?



 이런 이분법적인 논리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오류를 범한다.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으로 나눠져 있으면(몸) 성 정체성(정신)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몸과 정신은 같이 존재하는 진리일까? 그렇다면 정신은 뇌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심장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정신이 심장이면 뇌는 생각하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가? 심장이 만일 정신이라면 심장이 저장창치와 어떠한 사고를 담당하는 장치인가?










 이분법 적인 논리는 폭력적이다. '정상'이 아니면 '비정상'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는 어떤 사안에 대해 이해력과 사실 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다. 이분법적 논리의 불편함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이분법적 논리에서 더 나아가 공리주의적 관점까지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51대 49의 사안에서 49의 모든 의견이 무시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다수와 소수가 있다.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과 생각은 필요 없는 것인가? 집단과 개인이 있다. 집단을 위해서는 개인이 무조건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0.1%의 상류층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어떠한 이유인가?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내가 개인이 되기도, 다수가 되기도, 소수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진리는 없다. 명백한 논리와 근거 없이 그것은 '진리'야.라는 대답으로 모든 것을 퉁치려고 하는 사고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판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폭력적인 사고로 차별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은 이분법적인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좁은 영역에서 내 기분을 설명하는 것 자체도 어렵다.  나를 설명하는 것도 복잡하다. 나는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선과 악은 어떤 기준이 있는가? 나 한 사람 조차도 설명하기 복잡한데 모든 사회적 기준과 논리가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이야기 될 수 있을리가 없다.




 이 세상에는 차별받아야 하는 존재도 없고,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도 없다.


    



작가의 이전글 사이코지만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