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선 할머니는 15살이던 1943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만주 일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 해방을 맞았다. 일본군은 그를 깊은 산속에 버리고 떠났다. 할머니는 산을 기어 내려와 밥을 빌어먹고 다니다 중국 남자를 만나 룽징에 50여 년을 살았다. 위안부 생활 때 얻은 병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됐고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도 용기도 없었다.
그 사이 고국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가족은 사망신고를 했다. 타국에 버려진 이들에게까지 고국의 눈길은 닿지 않았다. 그런 피해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국 정부는 집계도 하지 못한다. 53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그의 운명은 귀향을 허락했다. 1996년 12월, 68살 이옥선 할머니는 김포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기자는 중국에 남겨진 위안부 할머니들을 고향으로 모셔오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중국 취재팀은 신변 문제와 법적 장애를 뚫고 할머니를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시키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기자와 할머니의 여동생은 김포공항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언니가 위안부로 끌려갈 때 꼬마였던 동생을 이옥선 할머니는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한스러운 운명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자매 주변으로 영문 모르는 고국의 동포들이 모여들었다 흩어졌다.
할머니의 고향은 부산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모습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동네 이름도 바뀌었고, 집 앞에 흐른다던 개천은 아스팔트 아래 묻혔다. 유일한 단서는 집 앞에 우물이 있다는 것과 영도다리에 걸어서 놀러 가곤 했다는 정도였다. 수소문 끝에 대략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할머니와 한나절 넘게 영도다리 근처 동네 골목을 무작정 헤매고 다녔다. 좁은 골목을 돌아서는 할머니가 말했다. "여기야 여기, 여기 내가 살았었어." 50년 전 윤곽을 희미하게 간직한 그 골목과 이제는 말라버려 뚜껑이 덮인 우물 앞에서 할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있었다.
귀향은 꿈에 그리던 것이었지만 운명은 여전히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현실이 그 앞에 놓여있었다. 가족들의 살림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위안부였던 그와의 만남을 꺼려했다고 이옥선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전쟁은 할머니의 인생과 가족들의 삶을 그렇게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2000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정착했다. 이후 활동은 언론에 대체로 잘 알려져 있다.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2002년에는 미국 브라운대를 찾아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나 만화도 있다.
잊고 지내던 할머니를 다시 뵌 건 2004년 한 여배우가 위안부 콘셉트로 화보를 찍었다가 나눔의 집을 찾아 사죄한 때였다. 수만 가지 감정이 뒤섞였을 할머니의 눈빛이 얄팍한 상술에 찌든 여배우의 얼굴과 씁쓸하게 겹쳐졌다. 이옥선 할머니는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일본서 우리 할머니들 다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젠 사람 몇이 안 남았잖아. 죽기 전에 빨리 (사죄)해야 돼"라고 말했다. 또 "(우리 청년들이) 많이 알아가지고 우리나라를 잘 지켜야 돼. 전쟁이 없는 나라, 평화적으로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돼"라고도 했다.
그의 마지막 소망은 단순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 보인다. 굴곡진 삶과 모진 운명이 단 한 번만이라도 그의 편이 되어주길 기원한다. 1928년생 이옥선은 92살이다. <아시아경제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