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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릴적앵두나무 May 23. 2023

어릴 적 앵두나무

꿈엔들 잊힐리야

요즈음은 '서울특별시'안의 어떤 지역이든 재개발과 아파트건축의 광풍으로 단독주택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나는 운이 좋게도, (무늬만이었지만)서울시 안에 살면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시절을 보냈던 호사를 누렸다. 아니, 성년이 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같은 집에서 계속 살았고, 도합 무려 28년을 산 후에야 이제는 낡아버릴대로 낡아버린 그 집을 팔고 인근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 집은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던 2층 양옥집이었고 내부는 나무느낌이 가득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보면 뭔가 산장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자주 바닥에 누워서 천장의 조각무늬를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2층 위에는 옥상이 있었다. 유성우 예보가 있던 어느 추운 날 아빠와 언니와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컵라면을 호호 불며 먹었다.



1층에는 마당이 있었다. 원래는 잔디로 덮여있던 그 땅을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콘크리트로 일부를 메워버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눈이오면 아무의 방해없이 우리만의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고, 비가 오면 이유 없이 큰 우산을 여러개펴놓고 그 안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바깥에도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밑은 창고로 사용했고 그 창고는 우리가족이 키우던 진돗개의 집이기도 했다. 한쪽에는 과거에 썼을 법한 펌프대가 남아있었고, 작은 수도와 배수구가 있었다. 빨래를 할 때 쓰던 것으로 생각되는 돌판도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나뭇잎을 모아 찧으며 소꿉놀이를 하고는 했다. 화단에는 누가 심었는지 모를, 찔레, 개나리나무가 있었다. 또 반대편으로는, 내가 태어난 해에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날아와서 싹틔웠다는 전나무가 있었다. 앨범을 보면, 내가 커감에 따라 전나무도 커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눈이라도 오면 하얗게 눈옷을 입은 모습이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이 전나무는, 2012년 즈음 태풍의 영향으로 쓰러지고 말았고 주변집들의 안전을 위해 결국 잘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내 평생의 가족같고 친구같았던 수호목을 잃어버린 기분이라 굉장히 낙담했었는데, 다음 해 봄에 아주 작은 아기 전나무가 바로 옆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전나무는, 우리가 이사하면서 외삼촌댁으로 보냈고 그 집 마당에서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고 한다.


화단의 흙은 지력이 좋았다. 따로 비료를 섞어줬던 것도 아닌데 신기할 노릇이었다. 식물을 '신경써서' 키워야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이사간 후에 화분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우면서 깨달았으니 말이다. 많은 작물들과 과일을 키웠다. 모종이나 씨를 심는 건 보통 내 몫이었고 내가 방치한 싹들에게 물을 주는 건 대게 아빠의 몫이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바로 집 근처의 화원으로 아빠와 함께 가서 꽃씨를 사는 것은 봄날의 소소한 재미였다. 어떤 해에는 강낭콩을 어떤해에는 조롱박을, 어떤 해에는 딸기를 심었다. 딸기가 너무 많이 열려 몇몇은 썩어버리기도 했다. 봉숭아도 몇 번 심었다가, 산에 들에 지천에 깔려있는게 봉숭아임을 알고 굳이 다시 심지 않았다(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 길에서 산에서 봉숭아름 딸 수 있는 지). 보통 매해 심는 채소는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 등이었다. 엄마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시다가 고추가 필요하다 하시면, 나는 마당으로 달려가 고추 두어개를 뜯어드렸다. 상추도 너무나도 크게 마치 배추처럼 잘 자라서, '상추를 먹기위해' 친척들을 초대하여 마당에서 바베큐파티도 하고는 했다. 엄마 아빠는 쉴 새 없이 마당으로 음식을 나르고, 고기를 구우시느라 굉장히 바쁘셨지만 기분이 좋아보이셨었다. 20년도 지난 오래전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좋은 흙을 가진 덕분에 비만 오면 마당은 또 지렁이들로 가득해졌다. 물이 올라 통통해지고 꿈틀거리는 수십 수백마리의 지렁이를 밟지 않고 대문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꺄아아아아악"비명을 지르며 그냥 무작정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해가 뜨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들은 그대로 마당 콘크리트위에 납작하게 말라붙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이 집의 마당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한가지는, 앵두나무일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아마 내가 태어나기 한참전부터 있었을 앵두나무. 항상 곁에서 봐 왔기 때문에, 다른나뭇잎들은 잘 구분못해도 앵두나무만큼은 단번에 알 수 있다. 어린 날의 기억이지만, 나뭇잎사이로 쏟아져내리던 햇빛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도 참 듣기 좋았다. 봄에는 하이얀꽃이 피고, 녹색의 작은 열매가 곧 통통한 하얀열매가 되더니 6월 즈음이 되면 불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높은 곳에 열린 앵두는 직접 못 땄지만 낮은 가지에 있던 앵두는 충분히 손이 닿을 위치에 있었다. 앵두를 따서 바로 입에 넣고 얌냠씹으면 앵두가 탁 터지며 새콤한 즙이 입안을 채웠다. 유치원때 즐겨들고다니던 보라색 양동이에 앵두를 따다 모으기도 했다. 나 이거 시장에다 내다 팔거예요. 라고 하면 어른들은 1인분도 안나오는 양이야 그만큼은 못 내다 팔아 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귀여운 듯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인가 앵두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꽃이 없으니 열매도 열릴 턱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난 후, 앵두나무는 겨울에 잎들을 떨구고는 봄에 다시 새 잎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 인터넷을 찾아보니, 앵두나무의 평균수명은 관리가 잘 되었을 시 50년, 일반적으로는 20년정도라 한다. 아빠는 앵두나무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수국을 심어두셨다. 큰 나무가 있던 자리에 작은 수국나무는 웬지 어울리지 않았다.


전나무도 쓰러지고 앵두나무도 없는 마당을 볼 때면 마음한쪽이 아파왔다. 내 어릴 적 추억들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그 허전함은 아빠가 세상을 뜨고나서 한층 깊어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 해 봄에는 마당에 아무것도 심지 않았고, 개나리와 찔레만 잠시 꽃을 피웠다졌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혐오하던 지렁이도 나오지 않았다. 집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1년쯤 조용히 살던 우리는, "더 시원하고 더 따뜻하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편리한 집"에 살고 싶다는 엄마의 의견을 따라,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게 됐다. 우리가 이사간 바로 다음 날 집은 해체되었고 지금은 빌라가 올라가있다. (평범한 35평 아파트임에도 이사간 첫날 언니가 내뱉은 첫마디가 "집이 왜 이리 좁아!!" 였던 것이 우습다.)


지금도 이 집에 대한 꿈을 꾼다. 대문이 끼이익 열리는 소리, 그리고 저벅저벅 들리던 아빠의 발소리, 반사된 붉은색 가로등불 빛에 비쳐보이던 흔들리던 나뭇가지의 그림자, 집안의 나무 냄새, 마당 한 구석에 살던 내 하얗고 따뜻했던 진돗개, 무성한 잎을 자랑하던 앵두나무와 내 전나무까지. 그리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발코니 창문을 통해 정말 쏟아지듯 들어오던 햇빛까지도 너무나 생생하다.


House 가 아닌 home에서 살며 좋은 기억들을 만들어준 그 집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 아이도, 현재사는 이 집에서 오래오래 따뜻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며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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