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우죽(전복내장죽) 한 그릇을 위해
활전복을 손질하는 건 상상이상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제주도에는 게우죽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전복내장죽이라는 음식이 있다. 나도 사실 대학생때까지는 이 음식이 뭔지 알지 못했고, 내장죽이라는 이야기에 무의식적으로 약간의 반감까지 있는 상태였다. 대학에 다니고 있던 어느 날, 아빠가 암 판정을 받았다. 아빠의 암 투병은 내가 회사에 다니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암에 걸린 가족이 있는 다수의 가정들이 그랬을 것처럼, 엄마와 나 역시 아빠에게 좋은 음식과 조미료를 뺀 건강식을 해 드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 엄마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음식에 대한 열의가 높다거나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내가 많은 경우에 특별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항암 치료로 허약해진 아빠의 체력을 보양하기 위해 닭고기, 장어, 전복 등을 알아보았다. 닭고기와 장어는 난이도가 높지 않았다. 그저 손질되어있는 고기를 사 와서 압력솥에 익히거나, 팬에 구워서 드리면 끝이었다. 문제는 전복이었다. 전복이야 먹기만 해 봤지 손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대도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평범한 20대 중에, 활전복을 직접 손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나는 당돌하게도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저렴하게 판매한다던 전복 한 세트를 인터넷으로 사서 집으로 배송시켰다. 그 결과 나는 퇴근하고 집에와서 십수마리의 꿈틀대는 살아있는 전복과 조우해야했다. “엄마, 전복 손질해봤어?” “해봤겠니! 어머 징그러워.” 엄마의 질겁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한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한 손에는 전복 한마리를 들고 어찌할 바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수돗물에 잠시 담가두면 기절한다해서 수돗물을 잔뜩 받아 담가 두었는데, 이 전복들은 기절하지 않았다. 일단 포기하고 그 상태에서 칫솔을 들어 구석구석 세척하기 시작했는데, 칫솔이 닿는 순간마다 전복이 몸을 비틀어대니, 이 또한 왠지 소름이 끼쳐서 오래할 수가 없었다.
활전복 손질을 검색해서 나온 다른 블로그 글에서는 ‘숟가락을 패각과 내장 사이에 깊숙히 넣고 숟가락을 비틀면 전복의 몸 및 내장과 패각이 분리가 된다'라고 했다. 시도해보았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복이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게 느껴졌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서 전복을 내려놓아야만했다. 전복이 한 두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사지 말고 본죽에서 전복죽이나 사드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엄습했다. 그러다 문득, 식탁 한 켠을 차지한 전기주전자가 보였다. 팔팔 끓는 물에 잠시 넣으면 전복이 죽지 않을까? 그러고나서 바로 요리하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기 주전자가 끓는 그 시간까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기를 도살해서 가공까지 마쳐서 제공하는 도살업자/정육점업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손질된 식재료를 사는 것의 편리함, 그리고 사람의 한 끼가 되기 위해 죽어야 하는 생물들의 삶까지 그 몇 분 사이에 온갖 생각이 다 든 것 같다. 주전자에서 삐이이 소리가 났다. 그 주전자를 들어 전복의 패각 사이 구멍에 물을 흘려보냈다. 전복의 몸이 순간 움찔움찔했다. 얼마나 뜨거울까, 미안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전복은 이내 움츠러 들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전복류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지만, 그 모습은 충격적이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에,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그래도 전복이 죽었기에 더 이상 떨지 않고 전복을 손질할 수 있었다.
세마리 정도의 전복을 패각과 분리했고, 살부분과 내장부분을 또 분리했다. 내장을 보고 순간 움찔 했지만, 그래도 블로그이미지들을 먼저 봤기에 심하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또 그 다음에 어려웠던 퀘스트는 이빨 제거 였다. 지금은 칼로 살짝 눌러서 부드럽게 이빨을 제거할 수 있게 됐지만, 이십대의 아가씨였던 나는 이빨을 뽑아내는 것도 그 이빨을 보는 것도 너무 징그럽다고 느껴져서, 그냥 숭덩 입 부분의 살까지 그냥 끝 부분을 잘라내버렸다. 전복의 한 1/4이 잘려나간 것 같다.
그 이후는 평이했다. 그냥 일반적인 죽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내장을 터지지 않게 냄비에 넣은 후 잘게 자르고, 참기름을 넣어 볶다가, 다진 채소를 볶고, 쌀을 넣고 볶고 쌀이 투명해지면 다시물 같은 것을 넣어서 끓여서 죽을 만들고 죽이 완성되면, 버터에 볶은 전복살을 고명으로 죽 위에 올려서 내면 되는 것이었다. 아빠도 나도 내가 만든 게우죽을 맛있게 먹었다. 밖에서 사 먹으면 한 그릇에 2만원 이상하는 음식인데, 확실히 집에서 해 먹으니 저렴하기는 했다.
그 때 게우죽에 입맛을 들여, 요새도 가끔 생각이 나면 게우죽을 해 먹는다. 이제는 활전복을 무식하게 고문하듯 찔러대지 않고, 냉동고에서 얼기직전까지 충분히 둔 후 손질을 한다. 그 땐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물론 미국에서 해 먹기는 쉽지 않아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마트에서 전복을 사서 해 먹는다. 예전보다는 전복값이 많이 싸져서 그렇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여담으로, 2019년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 아이와 아시아나 비지니스석에 탑승을 했었는데, 조식으로 전복죽(전복죽이었는지 게우죽이었는지 헷갈린다)이 나왔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22개월 아이는 엄마가 여유있게 아침식사를 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보이는 그릇마다 안에 손을 푹 넣든가, 그릇을 잡고 흔들려했다. 나는 결국 일어서서 한 쪽 옆구리에는 아이를 낀 채, 다른 한 손으로 전복죽을 일어서서 마셔야만 했다. 4년이 지난 후 이 또한 추억이 되었다. 십 몇년 전의 후들거리는 손으로 처음 전복을 손질해서 아빠에게 전복내장죽을 만들어드렸던 경험처럼 말이다.
지금도 나는 전복내장죽을 좋아한다. 그리고 전복죽도 좋아한다. 전복을 손질할 때마다 그 때의 기억과 돌아가신 아빠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