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마음
아마 어렸을 때 다들 그런 적 있을 것이다. 극한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떡할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면 '집에 도둑이 들면,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뜨거운 물을 뿌려야지!' 하는 상상.
어렸을 적 나는 자주 이런 상상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생이랑 길을 건너다 차가 오면 어떡하지?
를 유독 많이 걱정했다.
그때마다 나는 동생을 먼저 밀쳐서 구하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그리고 내가 차에 치여 아프더라도 동생이 놀라지 않게 침착한 말투로 119를 부르라고 말해야지, 다짐하며 상상 속에서 특훈을 실시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상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줄어들었지만, 대신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발이 느린 동생을 끌고 불덩이, 뱀굴, 태풍 등에서 죽어라 빠져나오는 꿈이었다. 동생 손을 이끌고 뛰는 내 발이 너무 무거웠다.
더 빨리 뛰어야 해!
동생을 구해내지 못할까봐 초조했다. 꿈 속에서 아등바등 너무 힘을 준 탓에 손에 손톱 자국이 생긴 채 일어나곤 했다. 이런 꿈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간혹 꾸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고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은
언니에겐 내가 짐인가 보네.
하며 섭섭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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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지만 겨울왕국2를 보면서 울었다.
솔직히 영화 자체로 보면 전작에 비해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뻔하고 예상 가능한 스토리 때문이었다. 엘사가 결국 안나를 두고 혼자 떠나는 장면은 겨울왕국2가 피하지 못한 여러 클리셰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었다. 진부한 스토리만큼 나 역시 진부한 사람이었나 보다.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해.
위험에 빠지더라도 혼자여야 해.
끝까지 동생은 지켜내야 해.
고구마 백개 먹은 듯 했던 엘사의 태도에도 '답답하게 왜 저래' 하고 마냥 비난할 수 없었던 이유는 26년간 언니로 살아 온 내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니들은 그렇다.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쉽지가 않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른다. 힘들다, 한마디는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데 ‘괜히 말해 뭐해’, 란 생각은 하루에도 수십번 한다. 책임과 의무라는 임무가 족쇄가 되어 마음 한 구석을 끌어내린다.
그래서 동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기 보단, 내가 챙겨야만 하는 짐이 되고, 동생의 일이라면 소상히 알려고 하면서 내 이야기는 동생에게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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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4년 터울의 여동생이 하나 있다.
어제는 소개팅 나간다는 동생의 삐뚤어진 옷매무새를 매만져주며 나도 모르게 으휴- 소리가 나왔다.
언니는 내가 그렇게 못미더워?
하며 동생이 장난과 진담이 반반 섞인 말을 건넸다. 아차. 왠지 코 끝이 찡한 걸 겨우 참아냈다.
실상은 동생들이 언니보다 더 단단할 때가 많다. 언니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동생들은 유약하지 않을 뿐더러, 걱정하는 언니들도 자기 앞가림 하기도 벅찬 미생들이다. 언니들, 책임감을 덜고 그저 ‘나’인 모습을 찾아보자. 능력있는 동생들에게 뒤를 믿고 맡겨도 된다. 아렌델은 안나가 맡았듯이.
써나,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