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멀어진 이유
엄마와 나는 견원지간이었다. 내가 개띠, 엄마가 원숭이띠. 우리는 곧잘 우리의 띠를 핑계 삼아 서로가 너무 안 맞는다 푸념하곤 했다. 실상은 감정에 서투른 첫째 딸과 첫째에게 많은 기대를 거는 엄마라는, 너무 보편적이어서 식상하기까지 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면 서로를 견원지간으로 간주하던 때의 우리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푸념이 사라졌을 때 우리 사이는 진정 견원지간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푸념이라는 것도, 단어 자체가 풍기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여전히 '감정 교류' 한 형태였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그러니까 그런 푸념조차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면, 그 어떤 감정 교류도 남아있지 않은 피상적인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푸념으로라도 그 어떤 감정도 털어놓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 나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몇 번이나 눈물을 옷자락에 찍어낼 만큼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믿었다). 아주 사소하고도 확실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터진 건 21번째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엄마와 나는 단 둘이 점심을 함께했다. 개강을 바로 앞두고 있던 때라 학교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의 칭찬이 고팠던 나는 내가 전공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이번 학기도 전공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할 건지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내 기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란 얘기였다. 대학 졸업한 지금에야 어머님 말씀을 백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하지만, 당시엔 그 말이 상처가 되었다. '나 잘했지?' 묻는 나의 유치함보다 '다른 걸 잘해야지'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시니컬함이 더 큰 잘못처럼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어째 '잘했다.', '잘하고 있다.' 한마디를 쉽게 해주는 법이 없다. 원래 태어나길 무뚝뚝한 사람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동생에게는 곧잘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면서. 이 사람은 내게만 이다지도 빽빽하게 군다,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아 알았어. 알아서 할게.'
결국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대답을 하고 말았다. 사실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내가 잘못한 건 곧잘 잊어버리고, 남이 한 잘못은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법이니까. 띠껍게 구는 내 반응에 엄마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영어 공부 좀 하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니?'
'어.'
그리고선 둘 다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다음 날이 되도록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날 일어났다. 내가 지금껏 맞이한 최악의 생일 아침이었다. 네 가족은 식탁에 둘러앉아 미역국을 먹었다. 난 미역국에 밥을 말고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그때가 사과를 건넬 마지막 타이밍이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처먹기만 하는 나와 비꼬는 말투를 장착한 엄마 덕에 식탁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절대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리! 자존심을 지키려는 두 여자의 방어기제가 강력하게 맞붙었다. 나는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살짝 거칠게- 하지만 엄마가 혼내기엔 애매할 정도로 - 내려놓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하며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선 곧장 침대로 몸을 숨겼다. 사실은 꽤나 쿵쾅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놔둔 읽다 만 책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1시간쯤 읽었을까. 거꾸로 솟았던 피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머리가 차가워지니 한껏 끌어올린 방어태세도 누그러졌다. 엄마도 잘한 거 없지만, 나도 잘한 건 없다 싶었다. 뭣보다, 생일날까지 불편하게 냉전 상태로 지낼 필요 없지 않은가. 사과하러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순간, 방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엄마 집 나간다. 연락하지 마.'
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를 들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현관으로 갔다. 벙찐 나는 급히 현관으로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쾅
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1시간을 들여 가라앉힌 피가 다시 거꾸로 치솟았다. 내 머리는 갑작스러운 비상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평소의 120%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팽팽 돌아가는 뇌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기보단, 엄마가 나가고 문이 닫히던 2초도 채 안 걸린 그 순간을 나노 단위로 저장하는 쓸데없는 짓에 소비했다. 더 쓸데없이는 마지막 순간의 엄마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슬로모션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흔하디 흔한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와중에 입은 뇌의 명령과 상관없이 '미친.' 이란 소리를 내뱉었다. 손은 아까 읽던 책을 집어던졌다. 심장은 쿵쾅대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집에서 그 누구도 화가 난다고 가출을 한 사람은 없었다. 가족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짓을, 그것도 가족의 생일날 하다니.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계속 메아리쳤다. 이건 선을 넘은 거야.
그 날로 나는 엄마가 다시는 선을 넘을 수 없도록 새로운 선을 만들었다. 이 선은 나의 마음을 절대 다치게 할 수 없도록 친 울타리였다. 그 어떤 사적인 얘기도 하지 않았고, 솔직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관심받고 싶은 마음도 버려두기로 했다. '말해봤자 소용없다'를 신념으로 삼았다. 내 말에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만 돌아와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면, 내가 말 자체를 안 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혼돈의 21번째 생일이 지나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이어지던 냉전은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그 긴장감이 점점 희석되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스스로 정한 선 덕분에 둘이 싸울 거리도 없었다. '그래 이대로가 좋아',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그 날들이 쌓여 얼마나 높은 벽을 세웠던 건지 알게 된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