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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Sep 22. 2020

03. 엄마 같은 사람은 되기 싫었는데

    나의 생일날 집을 나가버린 엄마를 원망했던 나. 4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내가 자꾸만 집을 나가려 한다.  이 집은 엄마와 함께 살던 집은 아니고, 남자 친구와 동거 중인 집으로, 이 사람과는 3년째 같이 살고 있다. 우리는 갖가지 이유로 싸운다. 묵찌빠를 하다가도 싸우는 게 우리다. 물론 묵찌빠 때문에 집을 나가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는다. 보통은 한창 열 올리며 싸울 때 보다 싸움에 지쳐 현타가 올 때, 그때 가출 충동이 인다. 


 요 며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별일 아닌 일과 조금 더 별일인 일로 남자 친구와 다투는 중이었다. 한참을 얘기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말없이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어김없이'란 표현이 더 맞으려나?).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 들자 주위 소리가 모두 블러 처리 되었다. 남자 친구가 뭐라 하는지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나완 상관없는 카페 소음처럼.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친정집으로 갈까? 아빠와 맘 편한 수다를 좀 떨고, 맛난 것도 좀 먹고, 한 때 내 방이었던 곳에서 나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을 거야. 서점이나 카페에 들러도 좋겠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읽다만 책을 읽거나 브런치에 글도 찌끄려보면 금상첨화일 텐데. 남자 친구는 나 없는 집에서 혼자 외로워하며 반성의 시간을 좀 보내라 하고...  '


당장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나갈까?'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에 맴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나가고 싶었다. 사실 이미 머릿속에 '나갈까'란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는 뜻이다. 마치 밤에 라면을 먹을까 말까, 퇴사할까 말까, 잠깐 쉴까 말까 하는 고민들과 비슷한 거다. 두 선택지 중 '말까'를 선택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그런 고민들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말까'를 골랐다. 지난 경험을 통해서 가출의 통쾌함은 얼마 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 쾅- 닫고, 복도를 쿵쿵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 세게 탁- 치고 1층에서 내리면 만땅이었던 자신감 내지는 우월감 등의 감정은 사라진다. 그럼 곧바로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후론 그 불편감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데, 그럼 가출한 의미가 전혀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그 불편함을 회피하려고 나간 거니깐 말이다. 나는 이 사실을 두 번의 가출을 감행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두 번 모두 5분 만에 먹을 거 사들고 돌아갔었더랬다.) 그러니까 어차피 지금 나가도, 후회하는 건 나다. 


 이번에야 안 나갔으니 망정이지, 생각해보면 나도 참 성질이 고약하다. 예전의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것과 똑같은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하다니. 하늘에서 엄마가 이런 내 꼴을 보고 있다면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며 혀를 끌끌 찰 것이 분명하다. 


'내가 집 한번 나갔다고 마음의 문까지 닫네 뭐네 해놓고 지는...'




    흔히 부모의 행동이 큰 상처가 되어 자식의 기억에 박힐 때, 어린 자식들은 커서 이런 부모가 되지 않을 거라, 절대 내 아이에겐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매 맞은 아이가 자라 매를 드는 부모가 되기 십상이고, 잔소리에 시달린 아이가 저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며, 알콜 중독자 아버지를 끔찍이도 싫어했던 아이가 커서 알콜 중독자가 된다. 닮기 싫은 부분을 꼭 닮게 되는 이 이상한 법칙을 심리학 용어로 '공격자와의 동일시'라 한다고 한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따라 한다는 심리 기전이다. 내게 고통을 준 사람을 따라 한다는 게, 참 비이성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나 자신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 공포에 떠는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째는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공격하는 행위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엄마가 내게 상처를 줬듯이, 이 사람도 내게 상처를 줄까봐 차라리 내가 먼저 나쁜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남자 친구가 먼저 집을 나가기 전에 내가 선수를 치고픈 마음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겨지는 사람이 된 게 자존심 상했어서 나가는 사람이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 불쌍한 나의 연인은 나의 자존심 회복 도구로 희생당할 뻔했다. 나와 엄마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깊은 감정의 골에 이 사람도 빠트리려 했던 것이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심지어 두 고래 중 한 마리는 만나본 적도 없으니 등이 터졌으면 정말 억울할 뻔했다.




    부모처럼 되지 않겠다는 다짐보다, 나도 모르게 부모처럼 행동하려는 무의식이 더 강력할 수도 있다는 건 실로 무서운 얘기다.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모습으로 평생을 산다니. 그러나 아주 다행스럽게도 이 대물림의 유일한 장점을 난 발견 해냈다. 바로 역지사지의 기능이다. 내게 모진 말과 모진 행동을 한 엄마의 포지션을 내가 차지하게 됐을 때 비로소 그녀가 당시에 어떤 마음이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더 자존심 상하기 전에 먼저 사과해줬으면 하는 마음, 좀 더 내 말을 들어봐 줬으면 하는 아쉬움, 부정적 반응에 대한 서운함, 나의 속상함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

 그동안은 상대의 마음보다 당신이 저지른 그 행동과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따지는데 급급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난 지금은 굳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어졌다. 엄마도 그저 나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아니, '내가' 엄마랑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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