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위해서 걸어야 한다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알베르트 키츨러'의 친절한 걷기 매뉴얼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일 내에서는 일타강사 급의 철학선생님 같은 이미지로 형성되어 있다. 그는 과거 변호사였고, 과감한 하이커였으며, 뛰어난 독립영화 제작자이기도 했고 현재는 철학자이다. 그야말로 인생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험한 사람답게, 자연스럽게 쌓인 풍부한 연륜으로 철학과 사색의 완성도를 끌어올렸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뛰어난 철학자들이나 세계적인 석학,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사실 거창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혼자서 사색을 즐긴다던지 담배, 혹은 독서나 명상 같은 하릴없고 단순한 버릇 같은 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중에 공통된 습관이 있다면 바로 걷기를 통한 산책이라는 것이다.
말이 근사해서 산책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어쩌면 방랑벽이나 역마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정신은 몸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의식의 꿈틀거림 혹은 사유의 몸짓이라는 것은, 걷기라는 신체의 물리적 움직임, 즉 일정한 심박의 박동과 출렁거리는 중력의 리듬에 의해서 진정되고 박자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안식에 이른다. 균일한 형태의 움직임을 반복하면 내면의 긴장이 완화된다. 리듬 있게 걸어 나가는 것은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이 춤은 몸과 마음을 동일하게 움직이게 하고, 동기화하고 조화롭게 하며 평온함과 유쾌함을 선사한다. 긴장되고 소란한 마음은 잠잠해지고 내면의 갈등은 가라앉아 결국 해소된다. 땀이 배출되며 땀구멍을 깨끗이 정화하듯이, 영혼은 마음속 불필요한 짐과 쓰레기들로부터 해방된다. 몸과 영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정서는 기분 좋은 균형 상태로 전환된다.
걷기 철학의 대부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그의 명저 '걷기 예찬'에서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고 말한다. 두 발로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한 감각, 사물의 떨림들이 되살아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지워져 있던 가치의 척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방랑벽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리베카 솔닛은 또 어떤가. 그녀의 두껍고 전문적이면서도 방대한 명저인 '걷기의 인문학'에서,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심코 어딘가를 걷는 행위를 통해서 얻은 결과라고 말하지 않는가.
알베르트 키츨러의 이 작품은, 다비드 르 브르통이나 리베카 솔닛과는 약간 결이 다르게 접근하여, 육체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사고의 연관관계에 주목하는 듯하다. 명상과 사색보다는, 온전하게 신체의 일부인 발을 이용해서 육체적인 움직임을 찬양하고, 그로 인해서 힘을 얻는 뇌와 정신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걷는다는 일정한 반복적 행위와 그 진동의 리듬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과도하게 요동치지 않고, 마치 일정한 박자의 기준을 알려주는 메트로놈처럼 평화롭고 건강한 본연의 주파스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더 침착해진다. 걷기의 균일한 리듬, 이런 형태의 운동이 주는 단순함과 여유로움,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 그로부터 이어지는 내면의 고요한 평화는 더욱더 평온하고 균형 있는 상태로 이어진다.
현대인을 더욱 날카롭고 난폭하게 만드는 정신의 진정과 감정의 다스림을 위하여 걸어야 한다.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딘가를 걸어야 한다. 걷기 위해서 나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한번 걸으면 멈추기도 쉽지 않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의 보편성, 그리고 관성을 드러낸다.
걸어라. 그리고 또 걸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친구여, 우리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면 길을 떠나게" (괴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