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지도 못할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흙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둔탁한 워커창으로 흙길을 밟을 때마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내 몸은 저 땅 속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번 써보지도 않을 야삽, 수통과 탄띠로 짓눌려진 어깨와 함께 떨구어진 시선은 앞 사람의 발자욱만 초점없이 향하고 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채 반복되는 걸음과 구호 속에서 정신은 어딘지 모르게 명료해져 과거의 자취를 찾고 있다. 주어진 시간은 무한한 것 같았고 과거의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반복되어 머릿 속과 눈앞에 잔상처럼 나타났다.
다리와 어깨의 피로가 한계치를 넘어 그 감각을 잃어갈 때쯤 뇌 속의 기억과 마음 속의 추억들은 더 또렷해져만 갔다. 과거를 마주하며 떠올랐던 부끄러움과 괴로움들을 끄집어내어 밟고밟아 그 감정이 무뎌질 때까지 반복했다. 건내지 못한 미안함과 받지 못한 사과들도 이제는 그저 작은 기억이 되어갈 때 쯤 가슴을 찢어놨던 첫사랑의 아픔도 견뎌낼만 한것이 되었다. 10대의 반항기에서 20대 초반의 외로움과 방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심리 치료가 아닌 육체의 고난에서부터 점점 치유되어 갔다.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나선 영화'와일드'는 세릴 스트레이드의 회고록 '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직도 '금발이 너무해'의 여주인공으로만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리즈 위더스푼은 그동안 배우로써 제작자로써 작품성있는 길을 걸어왔다. 어느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읽게된 이 책을 리즈 위더스푼은 비행시간 내내 정독하다가 비행기에서 내리지마자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
무엇이 리즈 를 움직이게 했을까. 셰릴이 고난의 PCT(Pacific Crest Trail) 트래킹을 선택했던 건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셰릴의 회고록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건 그녀의 경험과 고난을 공유하는 삶들이 이 시대에 넓게 퍼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정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부터 보호해주고 삶의 방향을 알려주던 엄마 바비(로라 던)는 셰릴에게 단순한 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어려운 처지 속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를 보였던 바비의 모습은 셰릴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엄마의 부재라는 큰 상실감 속에 삶을 망가뜨린 셰릴은 그 떨어진 나락만큼 긴 회복의 길을 택한것 같다. PCT 트래킹은 4200 KM에 달하는 대장정의 길이지만 동행인 없이 3~6개월의 고독한 고단한 길을 걸으며 삶의 무게를 덜어나갔다. 트래킹 시작점에서 함께했던 '몬스터'라 부르던 그녀의 배낭은 그녀가 충분히 짊어질만한 무게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긴 시간 밟아나간 그녀의 행군길 마지막 즈음에 듣게되는 소년의 'The red river vally'는 이 길에 그녀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비현실적으로(비록 소년을 통해 노래하지만) 위로해준다.
누군가 나에게 나의 베스트 무비가 무어냐고 물을 때면 주저없이 뽑는 영화들이 있지만 왜인지 마음 속에 이 영화가 계속 걸려왔다. 그저 가볍게 묻는 질문에 대답해줄 멋진 영화들은 차고 넘치겠지만 내가 진정으로 대화하고 나누고픈 사람에게 이 영화를 말해주고자 아껴두었던건 내 삶의 행군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