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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Sep 22. 2020

젊은 청춘들의 꿈을 담은 어촌의 미래를 만들다

김호연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 어촌계장



유난히도 설레는 가을의 문턱이었다. 따갑도록 피부에 내리쬐던 햇살의 기운이 어느 샌가 털썩 주저 앉더니, 슬쩍 슬쩍 시원한 바람이 차창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화사하게 반짝이는 한낮의 태양마저도 은은한 빛깔로 느껴질 만큼 하루하루 공기의 온도가 떨어지는 요즘이다. 이렇게 여름이 다 가 버렸나, 생각하다 보니 지금 찾아가는 바닷가 마을의 올 여름 수입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근래 몇 년 동안 제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어촌체험마을 계의 스타, 백미리의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휴가철도 아니고 주말도 아닌 평일의 오후.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던 마을 주차장이 생각보다 분주했다. 해변 입구에 자리잡은 제일 큰 건물은 새로 정비를 시작했는지 자재를 나르는 인부들이 오가고 있었고, 어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체험센터에는 스태프 점퍼를 입은 청년이 연신 들락날락 이다. 여러 어촌 마을을 다녀봤지만 정말 보기 힘들었던 새파랗게 젊은 나이 대. 약속 시간에 맞춰 바삐 뛰어 들어온 그 역시 청년 못지 않을 활기찬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는 첫 마디, “뭐든 물어 보세요”. 참 자신 있는 말이었다. 


백미리의 어촌계장을 맡은 지가 벌써 16년이라고? 생각보다도 더 젊으시네요. 


올해 56살이니까 처음 어촌계장을 맡은 건 40살이었어요. 나이 마흔에 어촌계장을 한다는 게 상당히 예외적이긴 했죠. 대부분 70대 이상이니까. 처음 어촌계장 하겠다고 나갔을 때는 그래서 떨어지기도 했었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일이 제대로 안 되니까 저보고 어촌계장을 맡아서 해결을 해달라고 하길래, 대신 조건을 걸었어요. 전적으로 믿고 전권을 다 맡겨달라고. 그때부터 하나하나 시스템을 바꾸어 갔죠. 


내심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다행히 백미리 이 마을에서 18대를 이어가며 살아 온 토박이라 마을 사정을 잘 알기도 하고 제가 좀 성격도 센 편이에요(웃음). 비리 없이 투명하게 운영을 하면서 하나하나 성과를 보여주니까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믿어주기 시작한 거죠. 어촌 계에서 일한 보람이 있게 수익도 확실하게 환원을 해주고 여러 가지 복지에도 신경을 쓰고요. 


특별히 고향에 다시 돌아왔던 이유가? 


학교 마치고 도시에서 일자리도 잡았었는데요. 전봇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고향에 다시 돌아온 지는 벌써 34년이 됐어요. 제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이 마을 전체가 바다보다는 농사일에 더 관심이 있는, 그리 잘 사는 마을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백미리 하면 전국에서도 부자 어촌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부분에서 그런 미래를 보신 거죠?


젊어서부터 바다에서 노는 걸 좋아했어요. 다이빙하면서 수중촬영도 열심히 하고. 그러면서 세상에 좋다는 바다라는 바다는 전부 다 다녀봤거든요. 그러면서 이곳 바다의 가능성도 본 거죠. 이 바다의 자연만 잘 보존해 놓으면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아서 찾아오고 그게 곧 돈이 되는구나, 이런 걸 직접 느낀 거죠. 

아무리 좋은 보석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저 발에 채이며 굴러 다니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시커먼 갯벌 진흙 속에 자연이라는 진짜 귀한 보석을 감추고 있던 마을. 그런 보석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이가 가까이에 있었으니 이 마을은 참 운이 좋았구나, 싶었다. 백 가지 맛을 품고 있어서 붙었다는 ‘백미리’라는 마을 이름의 진가 역시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 비로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마을에 청년들이 많네요. 요즘 어촌에서는 흔치 않은 모습 아닌가요? 


그렇죠. 어촌계의 평균연령이 70~80대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나마 경기도는 살짝 나은 편이지만. 전국에 2,200개 어촌계가 있는데, 솔직히 폐쇄적인 부분이 많아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어촌이 살려면 새로운 피를 받아들여야 해요. 어촌계를 열어서 젊은 어촌을 만들어야죠. 꼴찌였던 우리 어촌계가 현재 전국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데, 비결은 딱 하나에요. 우리는 젊어졌죠. 


어촌계가 열려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마을의 어촌 계에 들어오려면 다른 조건은 없어요. 딱 하나, 이 마을에 살 집이 있거나 그렇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있거나. 그래야 이 마을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니까요. 그것만 있으면 누구라도 우리 어촌계에 들어와서 같이 일을 할 수 있어요. 현재는 124명이 함께 활동하고 있죠. 


백미리의 어촌계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나요?


우리 어촌계의 고정자산은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공동재산이에요. 양식장도 안 하면 몸만 나간다, 이렇게 명시가 되어 있어요. 대신 백미리의 어촌계원은 바다에 나가서 일하고 버는 걸로 만족해라, 이렇게 합의가 되었죠. 그래서 외부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에요. 해마다 배당금을 주는데 참여활동을 일일이 체크해서 분배하기 때문에, 어촌계 활동에 참여율도 굉장히 높아요. 공동작업이라도 하면 120명 중에 121명이 참여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웃음). 


귀촌을 했다가도 실패하는 사례가 많잖아요. 이 마을로 귀어한 분들은 성공률이 높은 편인가요?


지금 체험센터에서 일하는 청년도 여기 출신이에요. 고향의 일자리로 돌아온 거죠. 기계화가 되면서 어촌에도 청년들이 할 만한 좋은 일거리가 많아요. 예를 들어 귀어인 4명에 원주민 1명이 법인을 만들면 일정금액 자부담에다 지원을 받아서 양식장을 할 수 있는데요. 이게 도시 부럽지 않은 수익이 나오고 있죠. 저는 일단 1년 정도는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라고 해요. 바로 배 사고 투자하지 말고. 마을의 일만 나가도 먹고 살 만큼은 되니까요. 그렇게 찬찬히 살피다 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거든요. 그렇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마을이 또 한번 젊어지는 거죠. 

힘겨운 세월이 주름 깊이 새겨진 늙은 어부의 얼굴만 상상했다면 백미리에서는 깜짝 놀랄 터였다. 어촌은 늙고 힘들다는 편견을 여실히 깨고 있는 청춘의 귀어인들, 그리고 그들보다도 더 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어촌계장이 사는 마을. 고리타분한 시간들이 먼지 풀풀 날리며 지루하게 흘러가는 어촌의 풍경이란 다 옛날의 말이었다.  


어촌체험마을을 하게 된 이유는?


이제는 남들이 내 동네에 놀러 와야 돈이 되는 세상이 되었어요. 이곳에서 나는 수산물이나 수산물가공품들이 제대로 된 값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해요. 도시 사람들이 와서 이곳의 자연을 마음껏 즐기고 나서 이 마을의 특산물을 사 가는 거죠. 이 마을이 브랜드가 되면 그냥 흔한 수산물이 아니라 여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이 되는 거니까요. 


코로나19 때문에 이번 여름은 힘드셨죠? 


원래는 주말이면 1000명까지만 예약을 잘라서 받을 정도로 성황이었는데, 이번 여름은 힘들었죠. 그나마 우리는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래도 체험센터 직원들 월급은 줄 수 있었으니까. 이보다도 훨씬 더 힘들어서 매일매일 적자가 쌓이는 마을도 많을 꺼 에요.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계획인지. 


차라리 이게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해변입구의 건물도 다시 지어야 했는데, 계속 손님들이 오면 먼지 나고 소음 나고 걱정이었거든요. 이 김에 깨끗하게 정비해서 다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려고요. 그리고 앞으로는 예전 인원의 절반 정도로 체험 인원을 줄이려고 해요. 사실 오는 손님들도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잡아서 가져갈 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손님 체험하고 싶어서 오는 거죠. 


이제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면, 앞으로 어촌체험에서 원하는 바도 달라지겠네요. 


그럼요. 눈 앞의 이익만을 바라고 바다 앞에다 상업시설만 빼곡하게 지으면 안 돼요. 차라리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공서비스 시설을 늘려야죠. 가족과 함께 와서 맘 편하게 쉴 수 있는 공원이나 산책로를 만들어야죠, 그 귀한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요. 당장 이윤만 뽑으려고 바가지 씌우지 않고 호객행위 하지 않고, 맘 편하게 자연 속에서 머물 수 있어야 해요. 그런 게 장기적인 안목이죠. 


오래 머물고픈 마을을 만들고 싶다, 이런 말씀인가요?


네. 좀더 나아가서 주변 마을과 연계해서 2박 3일짜리 여행코스도 만들려고요. 우리 마을 하나만 구경하면서 2박은 힘들 거든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인근의 아름다운 섬에도 한번 들어가 보고 옆 마을도 놀러 가보고 하면서 여유 있게 머물다 가는 거죠. 여기가 참 조용하고 유해시설도 없고, 가족 단위로 와서 머물기가 좋은 곳이거든요. 

이런저런 구체적인 계획과 구상들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그러서일까, 인터뷰를 하는 중간중간 그를 찾는 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에 그때그때 응대하랴, 이리저리 결정을 내리며 전달하랴, 최근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 첫 손에 꼽을 만큼 일분 일초가 바쁜 그였다. 하지만 왠지 신이 나 보였다. 별다른 보상도 없는 마을 일에 그렇게까지 열심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마을 일에 몰두하는 걸 집에서 반대하지는 않으세요?


제가 낙지 잡는 기술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넘버 3에 들 겁니다. 하루 세 시간 작업 나가면 100만원어치는 거뜬히 잡으니까요. 아내가 자기 먹을 낙지도 안 잡아줬다고 구박을 하죠 (웃음). 그러니 내 이익만 생각했다면 마을 일은 안 했겠죠. 하지만 저는 제 자식이 돌아오고 싶어하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젊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고,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마을이요. 그렇게 열린 마을이 되고 내 자손도 살고 싶어하는 마을이 되어야만, 우리 미래도 있는 거에요. 


그런 곳을 만들려면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지금의 자연만 잘 지켜주면 되는 거죠. 우리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딱 한 가지, 지금 자연을 파괴하지만 않는 것에요. 남미에 갈라파고스라는 섬이 있는데, 전세계 사람들이 그 섬 하나 보려고 수천 만원을 들여가면서 찾아 가요. 딱 정해진 인원만 받으면서 자연을 그대로 지키는 것, 그게 갈라파고스의 성공 이유죠. 화성이 참 넓은데 동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심지라면 이쪽 서부는 환경이 살아 있는 자연지역으로, 이런 게 진짜 균형발전 아니겠어요? 


이쪽 지역으로 군 공항이 들어온다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여기에서 매향리까지 꽤 거리가 있는데요. 예전에 매향리에 미 공군의 사격장이 있을 때 이 마을까지도 소음이 상당했어요. 사격장이 사라지고 나서야 좀 조용해졌죠. 근데 다시 이쪽으로 공항이 오면 문제가 없을 수가 없죠. 지금도 밤에 별 보러 나가면 지나는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데요. 이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소음이 다시 들리면 철새도 사람도 다 떠나는 거죠. 간척지를 만들면서 여기에 있던 정말 좋은 갯벌들, 습지들 많이 잃었잖아요. 이제야 조금씩 바다가 회복되고 있죠. 자연은 시간을 주고 기다리면 스스로 회복을 합니다, 언제나 이걸 망가트리는 사람이 문제인 거죠. 

이십 년 가까이 마을 일에 남편을 빼앗긴 아내는 가끔 툴툴거렸을 지 모르겠지만 아들에게는 참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아들에게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하라고, 이 마을에도 꽤 괜찮은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참 기쁜 아버지였다. 많은 이들이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꺼야” 라고 말하는 이 씁쓸한 현실에서, 이 마을의 자식들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여러 모로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행운을 가진 마을인 셈이다. 


마을의 미래를 말하는 내내 확신에 찬 꿈을 그리는 표정이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오늘 또 하루를 꿈틀거리며 살아 가는 건강한 갯벌, 백미리 바로 앞 바다라는 탄탄한 현실에 기반한 꿈이라서 그랬다. “지금 이 자연만 잘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참으로 간단하지만 명확한 해답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마을로 찾아가던 길에 보았던 찬란한 햇살과 바다가 다시 떠 올랐다. 나 역시 잠시 차를 세우고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을 참 반갑게 만끽하지 않았던가. 그의 마을에 꿈을 담은 젊은 청춘에게도, 그의 마을을 찾아 올 모든 손님에게도, 우리가 안겨줘야 할 선물은 지금 그대로의 이 자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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