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라이프 14화. 별것 없지만 별것 있는 하루
(별 내용은 없지만 인스타 스토리에 쓰다가 은근히 길어져서 아예 브런치로 옮겨와 남기는 기록)
베를린에 산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서야 베를리너돔(베를린대성당)에 처음 와봤다. 늘 지나가며 보기만 하다가 내부까지 들어간 건 처음이다. 3일 연속 집에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칩거생활(?)을 했더니 영혼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베를리너돔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
베를리너돔 홈페이지에 가입을 한 후 티켓을 예매했다. 이후 QR 코드가 있는 티켓이 메일로 왔는데, A4용지에 출력해서 가져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인쇄된 티켓으로만 입장이 가능하므로 방문시 꼭 지참하라는 내용이었다. 집에 프린터가 없는 관계로 티켓을 출력하려면 꽤 번거로워지는 상황. '그냥 메일에 온 PDF파일 그대로 캡처해서 보여주면 안되나?'
당연히 인터넷에 후기가 많을 줄 알고 폭풍 서칭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와 관련해서 올려놓은 정보가 없었다. '프린트 안해가도 QR코드 보여주면 입장 가능해요!'라는 명쾌한 대답을 찾기에 실패했지만 도전해보기로 했다. 마음 한켠엔 설마 모든 사람들이 티켓을 종이에 출력해서 가져갔을까 싶은 의문과 함께 종교의 너그러움을 믿었던 것 같다.
도착해서 우선 밖에 있는 물품보관소에 가방을 넣었다. 여기서 잠깐. 물품보관소 안에도 티켓 발권 기계가 있다.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를 보면 미리 온라인으로 예매해서 오지 않으면 입장 불가하다는 이야기들이 떠도는데, 이곳에서 바로 티켓팅해도 된다. 현금은 안되고 카드로만 가능하다.
대망의 입장 순간이 왔다. 표를 검사하는 직원에게 휴대폰 속 티켓을 보여주며 말했다. "Ich habe keinen Drucker(저는 프린터가 없어요)" 직원은 QR코드 기기를 화면에 찍은 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들여보내줬다. 오예. 인생은 역시 실전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결론은, 티켓을 출력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혹시 누군가 나처럼 궁금증을 안고 서칭할 때 이 글을 보고 도움이 되길 바란다.
#꼭대기
베를리너돔은 꼭대기까지 타고 가는 승강기가 없어서 직접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오르며 너무 웃겼다. 마치 극기훈련 같았달까... 사람들의 한숨과 헛웃음, 탄식이 뒤섞여 나왔다. 그동안 독일에서 꽤 많은 교회와 성당의 꼭대기를 가봤지만 승강기가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또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힐 대신 편한 신발을 신고 올 것을 추천한다.
나는 요즘 등산이 너무 하고 싶었던지라 오히려 좋았다. 베를린에는 산이 없어서 한국의 산들이 정말 그리웠던 참이다. 다들 힘들어할 때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올라간 나란 인간.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건강할 때 많이 돌아다녀야겠다고. 올라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라하는 나지만, 의식적으로라도 더 열심히 이곳저곳 다니고 보고 경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해프닝
베를리너돔은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정돈하고 기도를 드리다 4시 50분이 되어서야 일어섰다. 좀전까지 시끄러웠던 방문객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였다. 출구 방향이 표시된 간판들을 따라갔다. 그랬더니 입구랑 정반대 쪽으로 나오게 됐다. '어라...? 내 가방은...?' 건물 밖을 빙 돌아 처음에 입장했던 곳으로 향하니 이미 쇠문을 걸어잠근 상태였다. 물품보관소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시간은 4시 55분이 됐다.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아무도 뛰지 않는 여유로운 베를린, 그것도 베를린대성당 앞에서 전력질주를 했다. 다시 건물 밖을 빙 돌아 출구 쪽으로 달려갔다. 중간에 문 하나가 있길래 혹시나 하고 열려고 시도했지만 역시나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두 외국인 관광객 남성이 영어로 이미 문 닫았다고 알려주며 나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시간도 촉박하고 마음도 급한 데다가, 이제 내 머리와 입에서는 영어 패치가 전혀 안되고 독일어가 나왔다. 제대로 된 독일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계속 영어로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독일어로 설명하는 웃픈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은 독일어를 못했기에 그냥 영어로 대화하면 됐는데, 영어 세포가 몸에서 아예 삭제된 것 같았다. 이 지독한 0개 언어의 늪은 언제 끝날 것인가.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구글 번역기를 열려는 그들에게 냅다 고맙다고 외친 후 좀아까 나왔던 곳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열심히 되돌아갔더니 다행히 관계자분께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계셨다. 그는 나를 보고 놀라며 출구 방향은 저쪽이라고 알려줬다. 네 알아요... 제가 아까 그렇게 나갔다가 가방도 못 찾고 이러고 있어요...
그에게 다가가 나의 물품보관함 열쇠를 보여주며 가방이 그곳에 있다고, 어떻게 가야 하냐고 물었다. 관계자는 당황한 기색의 나를 보고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이미 폐쇄된 통로들을 지나 보관소가 있는 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그곳에는 또 다른 관계자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급해하는 나를 보고 괜찮으니 천천히 하라고 안심시켰다.
(독일어로 말씀하셨는데 이번엔 또 내가 독일어를 못알아들어서 영어로 다시 듣고나서야 이해했다. 0개 국어 대환장파티는 계속된다...) 전혀 늦지 않았으니 침착하게 가방을 챙기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혼자 우당탕탕 한바탕 하고 온 후라 정신이 없었는지, 심지어 보관함 문도 못열고 낑낑댔다. 지켜보던 관계자분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자기가 도와줘도 되겠냐며 나섰다.
그는 한번에 보관함 문을 열었고 나는 무사히 가방을 되찾았다.
이상 별것 없지만 별것 있는, 모모의 하루 기록을 마친다.
별
것 없지만 별것 있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