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꾸 똥꾸

구강충동과 항문충동

'빵꾸똥꾸'는 드라마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해리(진지희 분)의 전매특허다.

'빵꾸똥꾸'의 뜻이 무엇일까 인터넷을 뒤져보니 세 가지 종류의 해석이 나온다,

첫째, 별 의미 없이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이란다.

둘째, 방귀가 나오는 구멍, 똥이 나오는 구멍이라는 뜻이란다.

셋째, 빵이 들어가는 구멍(입)과 똥이 나오는 구멍(항문)을 뜻한단다.


나는 지금 세 번째 것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사람이 먹고 배설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먹는 일은 입이 하는 일이고 배설하는 일은 항문이 하는 일이다.

입은 여러 가지로 분화된다.

처음에는 먹고자 하는 충동 뿐이다.

먹는 일은 입만의 역할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입 외에도 폐가 호흡을 해 줘야 한다.

숨을 쉬어가면서 먹는 것과 간격을 맞추고 리듬을 찾는다.

그 리듬은 심장 박동과 연결된다.

아기가 젖을 먹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위장도 또한 중요한 성감대이다.

배가 고프면 제일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감대가 바로 위장이다.

위장과 연결된 내장들과 그 젖이 소화되고 나서 분해되어 배설되는 비뇨기관과 항문기관도 또한 신체의 중요한 성감대이다.


구강 거세와 항문 거세


젖병이든 모유든 아기가 잘 먹는 일에 대해서는 엄마는 칭찬을 많이 해 주는 것이 좋다.

칭찬이 부족하거나, 공감해 주지 않거나, 정서적인 돌봄 없어 아기가 상처를 받으면 구강충동은 역으로 발생하여 구토를 하게 된다.

구토는 구강충동의 방향이 전도되어 입이 항문화되는 기능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기는 자신의 존재가 엄마에 의해 존중받지 못하고 있으며, 아기를 돌보는 방식이 역겹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장이 신경증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돌토는 이것을 '내장 신경증'이라 부른다.

아기의 구토는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기가 젖을 먹을 때에는 '잘 먹는다' '예쁘게 먹는다' 등등의 칭찬과 공감적이고 따뜻한 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아기가 먹을 때는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먹어야 하며, 여기에는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생후 9개월이 되면 조금씩 이유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제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강거세이다.


항문기(18개월~36개월)에는 아기의 배변활동에 대한 엄마의 금지어가 들어간다.

아기의 배변활동이 기저귀에서 배변기로 옮겨가면서 한 곳에서만 대소변을 보도록 하면서, 나머지 장소에 대해서는 금지가 적용된다.

이것이 바로 돌토가 말하는 <항문 거세>이다.

구강기에는 유보되었던, 스스로 변을 보고 처리하는 능력이 항문기에는 발휘되어야 한다.

항문거세가 완벽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기는 자신의 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충동의 승화


구강충동은 먹는 것에 대한 충동이지만, 이 구강충동이 승화되면 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을 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욕망을 더욱 구체화하며, 관계적이고 유희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 된다.

구강거세가 실행되지 못하고, 구강충동에 고착되면, 아이는 삼키고, 찢어 벌기고, 토막내는 등 아주 잔인해 진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범의 정서는 바로 다음 단계로 발달하지 못한 구강충동에의 고착된 상태이다.


항문충동의 승화는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항문충동은 손과 관련이 있다.

항문충동은 아무 곳에서나 배변을 보는 것이 허용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장소가 제한된다.

배변하는 장소는 기저귀에서 변기로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항문 거세의 시작이다.


변기에서 배변을 해도 처음에는 엄마의 손을 빌어 뒤처리를 하게 되지만, 항문거세가 진행되면서 아기 자신의 손으로 배변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가 생후 36개월쯤이 되면서 아기 자신의 손으로 배변을 마무리할 수 있는 지경까지 가야 된다.

이 정도 되면 항문충동은 항문 거세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돌토에 의하면 항문거세는 배설문제에서 엄마와 분리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손으로 배변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면, 그동안 엄마가 아이의 몸을 돌봐주고, 옷 입혀 주는 일 같은 엄마의 도움도 끝나는 것이다.

항문거세가 일어나면 바빠지는 것은 바로 아이 자신의 손이다.

손으로 배변처리를 혼자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밥 먹고, 옷을 입고, 신발도 신게 된다.

항문거세의 효과는 아이가 더 활발해지고 장난감을 만질 뿐만 아니라 조작할 줄도 알게 되면서 놀이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항문거세를 실행하는 단계에서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놀이를 계획하고 관계 맺는 능력을 향상하게 되면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쾌락에 붙들리게 된다.([돌토의 생애와 사상], 80)

항문충동과 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눈앞에 맛있는 케이크가 있다면, 식욕이 작동되는 순간 케이크 가까이 가면서 손이 먼저 움직인다.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이어트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이 멈출 줄을 모른다.

항문거세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구강충동으로 입으로 케이크를 먹고 싶지만, 먹기 위해서는 손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항문거세가 진행되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케이크를 향하던 손이 어느 순간 멈춘다.

그리고 손을 감추게 된다.

이런 것을 보면 오이디푸스 시기(3~6세) 이전에도 어느 정도의 초자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돌토는 이런 초자아를 <전-초자아>라고 부른다.


먹고자 하는 구강충동은 항문충동을 전제로 한다.

즉 먹고자 하는 충동은 저 음식을 내 배설물로 만들고자 하는 항문 충동으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이어트하는 사람은 손을 감춤으로써 항문충동을 거세할 수 있어야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이 <항문 거세>이다.


뷔페 음식점은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구강충동과 항문충동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소이다.

반면 고급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은 두 충동을 어느 정도 거세하는 것이다.

그는 고급 스테이크를 먹기 위해 높은 가격을 지불하기 때문에 고기를 아껴가며 입맛을 최대한 즐기면서 절도 있게 희소가치를 먹고 배설물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이처럼 항문충동이 거세되면, 입의 구강충동도 어느 정도 거세된다.

구강거세는 입의 충동을 절제하는 것이라면, 항문거세는 손의 충동을 절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이디푸스기에 형성되는 초자아는 항문기에 손이 금지되는 것에 기원한다.

전-초자아는 입과 손 사이 관계를 끊어 놓는다.


상과 밥상

나의 초등학교 초년 시절에는 나는 아버지가 참 무서웠다.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아버지를 그냥 무서워했다.

누나와 형들은 아버지가 무서운 이유를 분명히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누나와 형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기후를 세세히 잘 살폈고, 말투에서 뉘앙스를 읽어냈다.

아버지의 감정모드를 알지 못하는 나는 늘 미운오리새끼였다.


밥상에 모여 앉아 식사하는 시간에는 나의 구강충동은 아무런 여과 없이 발휘되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와 무관하게 맛없는 것이 없었던 나의 식성은 모든 식구에게 미움거리였다.

밥상 위에 놓인 반찬들을 바라보는 형들이나 누나의 시선은 삼팔선을 그을 줄 알았지만, 나는 사자가 사슴을 바라보는 눈으로 음식을 바라봤다.

그들은 밥상에서 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선을 암암리에 긋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형누나 그리고 아버지 사이에 나름 밀약이 있었다.

밥상 위에 올라온 반찬이지만, 아버지만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그것을 구분해 내는 혜안이 있었다.

아버지만 먹는 반찬으로 처음 올라가는 것에 대해 그들 사이에 암호가 있었다.


'이건 상에 오르는 반찬이다'


바로 아버지가 먹는 반찬은 곧 <상>이었고, 우리가 먹는 반찬은 그냥 <밥상>이었다.

하나의 밥상이 아버지의 <상>과 나머지 가족의 <밥상>으로 개념상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 사이에는 밥상을 둘러싼 상징적 언어와 행위가 이미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눈치가 없는 나의 젓가락질은 위엄 있는 권위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을 눈치 없이 넘나 들었던 것이다.

나의 젓가락질이 방자함을 확인케 하는 것은 '쾅'하고 밥상 위로 내려놓는 아버지의 수저 소리였다.

아버지의 얼굴에 불고 있던 태풍이 내 가슴을 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역에 대한 도전이 눈치 없이 몇 번이고 거듭된 후였다.

아버지의 상위에 올라가는 반찬은 대게 성게알과 해삼창자젖, 그리고 우메보시 등이었다.

우메보시(매실을 일본식으로 담근 것)의 빨간 색깔이 내 시선을 끌었고, 나의 젓가락은 자동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나의 젓가락은 사자가 사슴을 덮치 듯 아무런 생각 없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상을 범하고 만 것이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고,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후에야 나는 나의 손이 가야 할 곳과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눈칫밥을 먹게 되면서, 나의 손은 항문거세를 경험하게 되었고, 동시에 구강거세도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 눈칫밥은 내게 초자아를 심어줬지만,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나의 입은 구강거세를 하지 못하고, 손 역시 항문거세를 하기는 힘든 세월을 지금까지 많이 지내 왔다.

그렇지만 좀 어려운 자리에 가면 먹고 싶으면서도 '안 먹어도 된다'고 불필요하게 사양하는 기억도 많다.


자녀들은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의견이 분명하다.

내가 먼저 먹어 보고 맛있어서 자녀들에게 주면, 자녀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면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것이어도 자기가 먹을 양만큼이 되면 수저를 딱 놓는다.

이렇게 구강거세와 항문거세가 조화롭게 잘 이루어진 것이 부럽다.

아마도 최소한 내가 자녀들에게 눈칫밥은 먹이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내장과 피부가 뒤집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