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지옥(2), 초기 대상관계의 실패

내면 깊숙한 곳에 지옥이 있다



초기 대상관계의 실패


유영철을 직접 면담하고 분석해야 더 많은 정보가 나오겠지만 레슬러의 책을 근거로 그를 분석해 본다면 그는 철저히 대상관계의 실패자인 것이다.

클라인은 유아가 맨 처음 접하는 대상으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젖가슴'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젖가슴은 유아에게 일관적인 전체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어느 때는 잘 나오는 젖가슴이 되지만 어느 때는 아무리 빨아도 나오지 않는 젖가슴이 되기도 한다.

유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머니의 젖가슴은 한 몸의 젖가슴이 아니라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으로 나뉘는 것이다.

유아는 그 좋음과 나쁨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선악을 구별한다.

구별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이다.

즉 내게 좋으면 선하고, 내게 나쁘면 악하다는 것이다.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


유아는 젖이 필요한데 나오지 않는 젖가슴, 편안하지 못한 불만스러운 젖가슴을 이해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래서 유아는 젖이 나오지 않는 젖가슴을 나쁜 젖가슴으로 여겨 환상가운데 공격하고 파괴하고 죽인다.

모든 공격적으로 나쁜 것(환상)들을 젖가슴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렇게 공격한 젖가슴(이를 투사라고 한다)이 이제는 유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박해망상을 갖는다.

이것이 클라인이 말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에 있는 사람의 정서적 상태이다.


만약! 편집분열적 자리에 유아가 고착되어 있다면 그 아이는 사람을 전체적으로 인격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직 나의 유익을 위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바로 뒤돌아 버리는 영리하지만 분열된 인격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흐르고 젖가슴의 존재가 두 개가 아니요 어머니라는 한 인격 안에 다 담겨있다고 인식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유아는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는 젖가슴을 물고 뜯고 죽이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공격한 젖가슴이 시들고 말라죽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 단계를 클라인은 "우울적 자리"라 이름 붙였다.

우울적 자리는 아기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넘어와 제대로 사람이 되어 가는 단계다.

나를 알고 너도 아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희미하지만 유아는 대상에 대한 염려를 하며,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줄 알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4-5세 경에 남자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형성되는 것이 죄책감이라 했는데 그것을 클라인은 1세 이전으로 옮겼으니 그녀는 한동안 정신분석의 이단자로 여겨질 만도 하다.


문제의 본질을 잘 살펴보자.

유영철은 자기 부인과의 관계에서 이혼을 당했기에 그 분풀이로 부인과 같은 업종에 근무했던 여인들을 죽인 것이 아니다.

그의 내면세계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대상들에 대한 극도의 격노와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지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부 현실에서 유영철은 그 지옥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사람을 죽이고 기계로 밤새도록 토막을 낸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택시를 타고 기사와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등산로 근처에 불법 쓰레기 투척하듯 그렇게 시신이 담긴 검은 쓰레기 봉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가 다음 사냥감을 고른다.

이번엔 어떻게 유혹해 죽일까?


레슬러가 말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의 내용은 한 방송 작가가 요약한 내용이다.


한 연쇄 살인범의 어머니는 대학의 교직원으로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너무 떠들고 누나들과 자주 싸운다는 이유로 아들 방을 자기 마음대로 지하실로 옮겨버리는 매우 독선적인 어머니였다.

명랑하고 쾌활하다 못해 개구쟁이였던 아들은 창문 하나 없는 어둡고 답답한 지하실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와 누나로 대변되는 여자들에 대한 분노를 무의식 속에 키워왔다.

그는 결국 성인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범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그 어머니 입장에서는 걸핏하면 떠들고 싸우는 녀석이니 혼자 있으면 좀 더 얌전해지고 남매간의 우애도 돈독해질까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방을 옮겼을 것이다.

실제로 녀석은 방을 옮기고 나서 좀 더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외로움과 분노로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어머니 눈높이에서는 어김없이 철이 드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 이 얼마나 큰 괴리감인가?

어린 시절은 굳지 않은 시멘트로 비유할 수 있다.

아직 굳지 않아 말랑말랑한 시멘트 위에 "바보, 병신"이라고 쓰면 그 글자 그대로 굳어진다.

거의 영구히 굳어진다.

그러나, 그 위에 "소중한 아이. 사랑한다"라고 쓰면 또 그대로 굳어 영구히 굳어진다.


교육과 사육


우리 사회의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자녀를 이제까지 머리 좋은 아이, 재능 많은 아이만 키우려고 몸부림을 쳐 왔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은 고급스러운 사육을 시켜왔다.

사육에 무슨 인격과 사랑과 배려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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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사건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자녀 교육과 학교 교육의 총체적 실패를 보여준다.

언제까지 내면의 지옥이 만들어지도록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이렇게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보도되어도 또 며칠이 안되어 까맣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마음은 더 무서운 지옥이 아닌가?

우리의 상태는 어떤가?

아동학대가 수도 없이 늘고 보도되는 것은 소수라고 한다.

이제 바쁘다는 핑계를 그만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우리 사회가 더 인간적, 인격적인 자정능력을 잃어버리기 전에 그리해야 한다.

가면 갈수록 범죄는 지능화되고 끔찍해지고 있다.

가면 갈수록 교육에 투자하는 돈도 많아진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원인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가정에서 찾자.

자녀 교육에서 찾자.

길을 잃으면 길을 잃은 곳에서부터 나침반을 봐야 한다. 우리의 근원에서 문제를 찾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희망을 찾자.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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