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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의 이상한 유아성욕(1)

엄마 같은 여자 vs 애인 같은 여자

유아성욕이란?


이것은 프로이트의 개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생에서 성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는 바로 유아기이다. 

'아우성'의 구성애 씨도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기가 젖을 한번 먹을 때마다 뻥(마약)을 한번 맞는 것과 같댜"


프로이트는 유아의 모든 행위 속에서 '성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마다 짜릿함을 경험한다. 

이처럼 아기는 젖을 먹을 때뿐 아니라, 어머니가 안아줄 때, 목욕시켜 줄 때, 예쁘다고 쓰다듬어 줄 때 등등 유아는 어머니와 신체적으로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짜릿한 성욕을 맛본다. 

그 짜릿함은 갓난아기의 시기일수록 강도가 강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욕은 근친상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성욕을 억압하게 된다. 

그 순간은 아마도 아버지가 아기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하는 시기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이러한 개입을 '오이디푸스'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개입되면서,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서 아기의 근친상간적인 성적 욕망은 억압된다.

이러한 유아성욕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개입은 No! 를 하는 금지로부터 시작된다.


  "더 이상 엄마 살 대지 마!"

  "더 이상 엄마와 같이 자지 말고 이제부터 너는 네 방에서 자!"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2자 관계는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를 떼어 놓는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강력한 권위가 필요하다.

이렇게 아기가 오이디푸스로 들어가면서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욕망은 억압된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거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억압된 욕망을 가지고 사춘기 이후에는 이성을 만나기도 하고, 공부라든가 취미, 어떤 목표 달성 등을 성취하는 에너지로 전환하기도 한다. 


유아성욕이 풀려날 때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변형된 리비도를 가지고 소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연애하고 사랑하며 결혼까지 이른다고 해도, 결혼한 대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다른 차원에 있는 리비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남모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정상적인 사랑의 에너지를 가지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지만, 뭔가 다른 차원의 파라다이스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이미 결혼을 하였지만,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성에게도 관심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의 배경에는 유아기에 억압한 유아성욕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시, 저 사람이 내 유아 성욕을 끄집어 내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의식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난다. 

사람이 그런 대상을 만난다고 해도 자신의 유아성욕 성취를 위해 무조건 대시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이 유아성욕을 자극해 주는 대상이 나타나서 정말로 이 유아성욕을 억압에서 풀어내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큰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유아성욕이라는 것은 오랜 세월 억압해 온 에너지로서, 매우 원초적인 형태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서 결코 세련되지 못한, 오랫동안 쌓아 온 현실을 무너뜨리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어떤 대상이 나의 유아성욕을 자극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상대방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할만한 일은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있는 외도나 불륜과는 좀 결이 다르다.


엄마 같은 여자 vs 애인 같은 여자

남자에게는 두 가지 여성상이 있다.

하나는 엄마 같은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애인 같은 여자이다.

한국의 남자들은 대부분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한다.

여자들의 불만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편은 왜 나를 엄마로 착각해요?"

  "남편은 내가 자기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 역할을 하게 만들어요."


남자들은 이런 인식조차 없지만, 여자들은 대부분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선택을 한다.

왜냐하면 남자가 엄마 같은 여자를 집안에 들임으로써 안심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 같은 여자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성에 대해 둔감하여 자신의 여성적 모습을 잘 가꾸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의 시선에 잘 노출되지 않는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자신의 여성성을 포기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자각이 일어나는 여성은 중년기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래서 부부관계의 권력 구조가 역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의 삶이 본래 이런 것이다' 라며 포기한 여성은 중년기가 되면, 몸이 푹 퍼진 소위 '아줌마'가 된다.

이때부터 여자는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이 60이 되면 화병, 요실금, 방광염, 갑상선 문제, 골반통증, 자궁과 유방 등에 여성적 질환이라는 신체 증상들을 떠안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정하는 삶의 방향성에 따라 두 가지 방향의 삶의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만일 아내가 중년기 반란을 일으켜 관계의 역전을 도모하게 되면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아내가 가정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아내가 중년기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동안 아내가 모성성만을 발휘하면서 살다가 이제 나도 여성성을 찾아야 되겠다는 자기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가 여성성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남편과의 권력관계를 역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내가 여성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다툼이 이어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철들어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남편은 이런 아내를 통해서 엄마 같은 여자에게서 애인 같은 여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남편은 한 여자에게서 두 여성상을 통합하게 된다.


만일 아내가 중년기를 넘어가면서 남편에게 모성성을 사용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남편은 아내에게서 여자다움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에 밖에서 '애인 같은 여자'를 찾게 된다.


최태원-노소영 커플에게서 모성성과 여성성


최태원 회장은 자신의 아내에게서 어머니 같은 여자와 애인 같은 여자 등 두 여성상을 통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최태원 회장의 유아적인 면모가 여실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 자기 스스로 두 여성상을 통합할 능력이 없는 측면이 기본적으로 있다.

내가 노소영 관장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외도를 하는 과정과 소송 과정을 지켜보면서 최소한의 정보를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노소영관장은 남편에 대해 모성성을 많이 사용하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일찍부터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혼자 고통스러워할 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결과 유방암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아내가 엄마 같은 여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가정을 지키는 데에는 크게 안심할 수 있게 되면서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에너지를 사회적 활동에 집중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대신 두 사람 사이에 부부간 성관계를 지속적으로 해 가기가 어렵다.

부부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오직 자녀 생산이라는 목적에만 성을 사용하는 데에 국한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엄마 같은 여자이고 아들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성관계를 할 때마다 근친상간적인 느낌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로 성관계를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십상이다.

마치 어떤 광고처럼

   "가족끼리 왜 이래?"


가 되면서 서로 신체적 밀착을 자제하게 된다.


이런 세월을 오래 보내다 보면, 남편은 밖에서 '애인 같은 여자'가 나타나면 자동적으로 눈이 돌아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열리게 된다.

최태원 회장이 바로 그랬다.

그렇다면 노소영 관장은 어땠나?

그녀는 미성숙한 남편과 살면서 모성성을 발휘하면서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해 왔을 것 같다.

남편이 미성숙하게도 너무나도 당당하게 아내에게 유부녀와의 외도를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심지어 상간녀에게 이혼할 것을 강요했던 것까지 아내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혼외자식이 생겼다는 것까지 알려줬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노소영은 마치 어머니처럼 흔들리지 않고 심리적 부침을 견뎌냈고, 심지어 혼외자를 입양하여 자기가 키우겠다고까지 했다.

매우 큰 바위 같은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관점들은 최태원 회장이 왜 이렇게 현모양처이자 조강지처인 아내를 마음에서 떠나게 되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남편이 너무 철이 없어서 노소영은 스스로 여자가 되기를 포기했던 것 같다. 

노소영이 어머니 역할을 버리고 더 일찍 여자가 되고자 했다면, 이혼은 더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노송영은 남편에게 한 여자가 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모성성으로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성성이 에너지가 다할 때가 바로 이혼소송을 진행할 때였다.

이제 남은 모성성을 가지고 세 자녀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유아성욕을 자극하는 여성을 만나 어머니 같은 아내에게서 맛볼 수 없었던 '애인 같은 여자'를 경험하게 되었다.

최소한 노소영관장은 자신의 모성성을 가지고 남편의 유아성욕을 발현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의 유아성욕은 온전히 충족되기에는 결격사항이 있다.

그 결격 사항 때문에 그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으로 평가될 수 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의 사랑은 자신의 삶을 패망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서 서술될 것이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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