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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딸 vs 어머니의 딸

여자의 9배 사랑(추가)

딸이라고 같은 딸이 아니다


딸은 두 종류가 있다. 

어머니 딸과 아버지 딸이다. 

대부분이 어머니 딸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서 사용하는 딸이며, 어머니와 딸은 동체성을 이룬다.

즉 감정과 판단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딸은 모든 면에서 순종적이고 모성적이고, 모든 것을 돌보는데 탁월하다. 

어머니의 딸이 왜 이렇게 모성성을 많이 사용하느냐 하면 , 여자는 남자를 9배를 사랑한다.

여자의 리비도는 남자가 가진 리비도의 9배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1:1의 관계가 아니다. 

여자가 9배의 에너지를 집중하다 보면 남자는 견뎌낼 수 없으며, 여자의 9배 사랑에 대응하지 못한다. 

남자는 아내의 모성성으로 돌봄을 받고자 하는 아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여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다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히스테리를 발동시킨다.

여성적 에너지 말고 남성적 에너지, 모성성 등을 사용하면서 넘치는 에너지를 이리저리 배분한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여성성을 외면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못 찾게 된다. 


여성은 신혼 초에는 순종적 아내가 된다. 

여성은 자기 불신과 자기 절제와 자기 모멸감으로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에게 해 주는 말로 그것이 자기 정체성인 줄 안다. 


중년기,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을 이해해 주지 말라

남자는 절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자꾸 가르치려 한다. 

결혼 초부터 서열로 제압한 결과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자기 권위를 지시하고 가르치고 하는 형태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남자는 계속해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자기 확신이 없고, 자기 불신이 많기 때문에 남편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여자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 안 된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말을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능력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그 에너지를 사용하고자 한다. 남자와 1대 1 대응관계에 있다면, 남편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그 자리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튕겨 내기도 하고, 반발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수용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 

이것이 바로 모성성이다. 

그래서 남자의 모든 면을 이해를 다 해 내려고 노력한다.



또 한편으로 여자는 이 결혼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좀 참고, 억압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남자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한다. 

남자가 말이 안 되는 주장, 말이 안 되는 지적질을 하는데도 여자는 그것을 다 이해해 내려고 한다. 

남편에게 미움이 올라오면, 그 미움은 내가 나빠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지 말라. 7번을 용서하되 그것을 77번을 하라. 얼마나 많은 용서를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이 이해를 해야 하는가? 

여자는 남자의 세계를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다 보니까,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더라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더라 고백한다. 


어머니의 딸


원수는 가족이다. 남편이 용서가 되고, 남편이 이해가 되는데,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이해 못 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 한다. 

그 결과 여자는 이런 상처, 저런 고통을 받으면서 다 견뎌낸다. 

한없이 모성성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9배의 사랑을 99배로 늘여서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딸에게는 이런 상처가 고통이 젊을 때는 독이지만 자기 속에서 묻혀서 자기를 찌르고, 자신을 괴롭히고,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내면 안에 묻히고 묻혀서 내 안에 화석이 되어 버린다. 

화석이 되었다가 뻥! 하고 폭발하는 순간이 온다. 화석이 석유가 되어서 에너지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안에서 천연가스가 뻥! 하고 터져 나오게 된다. 안에 있던 에너지가 밖으로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때가 바로 갱년기이다.


그동안 이모양저모양으로 참아 왔던 것, 말에는 힘도 설득력도 없다고 남편의 권위에 눌려서 숨고 억압하던 위치에서 빵! 하고 폭발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권력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주인과 노예가 달라지듯이... 

부부간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발생하면서 권력의 이동이 일어난다.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어느 순간 뻥! 하고 터져 나온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긴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터져 나오기도 한다. 어쨌건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      

어머니의 딸로서 억압적으로 살았던 여성의 삶은,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 된다. 기껏 해봤자 40대 후반이다. 그래서 앞으로 그 에너지를 가지고 50년 이상을 살아가게 된다.  

예일대 교수가 쓴  [여자의 인생 사계절]이라는 책을 보면, 15년에 걸쳐서 40명의 여성의 삶을 추적했다. 

그 책의 주제가, 여성에게 닥쳐오는 두 가지 문제, 즉 자녀 양육이냐 사회적 경력이냐이다. 

거기서도 결론을 못 내려 준다. 

이게 여자들의 문제다라고 끝난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서도 여자들은 대부분 ‘어머니의 딸’로 산다

그 책에서도 갱년기가 새로운 삶의 기회이다라는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저자는 여성의 인생 사이클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한다.  


아버지의 딸 

아버지의 딸이 있다. 

뱃속에서부터 엄마 자리 탐내는 딸이다. 

프랑스 아동정신분석가 프랑수와즈 돌토에 의하면, 뱃속의 딸은 이런 의심은 한다고 한다.   

  

 “내가 잉태되는 순간, 엄마는 오르가슴을 느꼈을까 안 느꼈을까?”     


 이런 딸은 100% 아버지의 딸이 된다. 

이런 딸은 태어나서도 엄마와 동일시하지 않고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이런 딸의 아버지는 대개 ‘딸 바보’가 된다. 그래서 부성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예의 주시하면서, 아버지의 치밀한 사회적 기술들을 어릴 때부터 남자들이 살아가는 방식, 아버지들이 만들어낸 규칙, 규범, 세상 통찰 방법 등을 터득해 왔다. 

이런 여자들은 대개 유능하다. 

남자들과 경쟁하는 영역에서 강하다. 

남자들에게 결코 지지 않는다. 

그녀에게 여자들은 자신의 경쟁의 대상이 안 된다. 

일찍이 사회성을 깨우쳐 왔기 때문에 경쟁에 능하다. 

아버지의 딸들은 여성성을 별로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성적인 능력이 끝나가면, 중년기가 될 때 더 이상 경쟁상대가 없어진다.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은 대개 남자들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까지는 경쟁적인 구조에서 요이 땅! 하면, 젊은 시절에는 여자들이 거의 다 우위를 차지한다. 교육대학 합격률, 공무원 시험 합격률 등을 보면, 여성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딸들의 경쟁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성취감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여성성에서 나오는 성취감이 아니다

부성콤플렉스에서 보내 주는 에너지일 뿐이다. 

남성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있다. 

이런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나면 중년기가 된다. 

더 이상 경쟁의 대상이 없고, 삶의 의욕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래서 아버지의 딸은 중년기를 넘어서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결혼도 못하고, 주변에는 경쟁자만 있지 친구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인생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그렇지만 때는 늦었다.       

아버지의 딸은 더 이상 남성인격을 사용하지 말고, 여성성을 찾는 것을 자신의 인생 과제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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