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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새 출발하는 꿈(2)

딸의 심리적 모친살해 vs 딸이 죽는 꿈을 꾼 어머니 

딸의 심리적 모친살해, 잔인한 공격


앞의 글 [새 출발하는 꿈]을 꾼 여성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이 부모에게 너무나도 잔인하게 공격한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엄마! 죽어! 딸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 살아서 뭐 해?"


아버지에게 


  "아빠도 죽어. 헛살았어! 아빠의 힘든 인생은 아빠로 그쳤어야지!"


하며 울부짖고는 부모의 집을 나온 딸.

그 이후 문자로도 부모에게 죽음을 선포하고 분노와 폭언을 그치지 않는다.


내게 그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는 질문이었다. 


아마도 어머니와 딸 사이에 이렇게 사이가 벌어지고, 딸이 어머니를 인륜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잔인하게 공격을 하는 경우를 경험한 어머니들이 많다.

그동안 나도 상담현장에서 여러 번 경험한 케이스이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사이가 멀어져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어머니와 딸 사이는 밀접하고 매우 가까우면서도 멀다.

일반적으로 상담의 현장에서도 이런 모양의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해결 불가능한 미제로 남아있다.

그것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는 어머니를 다음과 같이 설득시켜야 했다. 


어머니-딸의 동체성 


어머니와 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어머니와 딸 사이는 심리적 동체성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하여 사용해 온 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심리적으로 얽히고설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이것이 어머니의 것인지 딸의 것인지 분간을 하지 못한다.

딸은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할 때, 이것이 어머니과 원하는 것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구별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남편감을 찾을 때 자신이 원하는 남자에게 콩깍지가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남자에게 콩깍지가 씌워진다.

대학진학을 위해 학교나 전공을 선택할 때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미리 알아 선택한다.

어머니는 그것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며, 딸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새 출발을 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는 딸(앞의 글)의 경우 어릴 때부터 부모의 상황에 의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얽히고설켜 오랜 세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편집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딸은 부모와의 복잡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해 왔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부모의 심리적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이 올라올 때면, 거칠게 항변하고 무자비한 용어를 써 가면서 울부짖는다.

부모와 그냥 조용히 합리적이며 순리에 맞는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은 그렇게 비비 꼬여 있는 관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딸은 무자비하고 냉혹한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런 장면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필시 <패륜>으로 밖에는 인지되지 못하 것이다. 


심리적 모친 살해, 사랑과 환멸의 변증법


그것은 바로 심리적 모친살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딸은 <패륜아>라는 오명을 쓰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어머니의 입에서 이 <패륜>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 딸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심리적 <모친살해>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엄마! 죽어" "아빠도 죽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안에 오래 동안 거주해 온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딸이 이렇게 충격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냥 조용조용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설득하다가는 오랜 세월 얽히고설켜 온 어머니 아버지와의 부정적인 정서적 관계를 끊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상담 현장에서 이런 경우의 내담자가 가끔 찾아온다.

이 딸의 경우처럼, 딸은 갈수록 어머니에 대해 무자비해지고, 모녀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어 갈 뿐이다.


이와 유사한 여러 케이스를 거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 있다.


나의 상담 목표는 이 모녀를 화해시키고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에 둬서는 안 되더라는 것이다. 

이런 모녀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에는 상담으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상담이 끝난 후 수많은 세월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정에 있는 딸은 대개 편집증의 상태에 있었다가 부모와 정서적 결별을 선언하면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다. 

편집증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오랜 세월 어머니와 <사랑과 환멸>이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에 있어 왔다는 것이다. 

상담을 통해 심리적 발달이 일어난 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받아 온 사랑으로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가게 되지만, 통합되지 못한 환멸을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투사함으로써 편집증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놓쳐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심리적 사실이 있다.

딸이 미움과 환멸, 분노와 불안을 투사하는 대상인 어머니는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 딸은 어머니에게서 받아 온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하다가 미움과 증오가 올라오면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 미움과 증오를 어머니라는 대상에게 집중적으로 투사하게 된다. 

당장 어머니가 눈앞에 없어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당해 왔다고 여기는 장면들을 떠 올리면서 어머니를 더욱 증오하게 된다.


왜 그렇게 세상에 대한 환멸을 다 모아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투사하느냐 하면, 어머니만큼 사랑하는 대상이 없고, 어머니만큼 안전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또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쌓인 미움과 증오는 어머니라는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모아 놓는다.

그래서 딸은 끊임없이 어머니에게 심리적 모친살해를 감행한다.


딸 어머니의 꿈


딸이 비행기로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는 꿈(앞의 글)을 꾸는 시점에 어머니도 다음의 꿈을 꿨다. 


   딸이 죽었다. 그런데 의외로 나의 마음은 담담했고, 뭔가 분명해지고 명확해졌으며, 무엇보다 눈의 시력이 회복되면서 세상을 뚜렷하게 보게 되었다. 심지어 나는 딸의 죽음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의 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딸의 모친살해를 감행해 옴에 따라 어머니와 딸은 이제 심리적 동체성에서 벗어나 각자 정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꿈에 딸이 죽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늘 함께 움직이며 어머니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딸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모녀간에 서로 복잡하게 얽힌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이제 어머니는 딸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한다.

딸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소망도 남겨 둬서는 안 된다.

마치 조선 시대 딸을 시집보내면,그림자 같은 출가외인이 되어 생전에 친정을 찾지 않아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림자같은 존재가 되듯이 딸에 대해 무덤덤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했다.


나의 모든 말을 이해하게 된 그 어머니는 


  "그렇다고 하면, 저는 안심할 수 있어요. 이제 떨어져 나간 딸이 자기 삶을 살 수 있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됐어요."


라고 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복잡한 미묘하게 꼬여 있는 가족 상황에서 딸이라도 독립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고마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을 떠나 보내는 깊은 애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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