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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두 가지 언어 : 근친적 언어와 사회적 언어

공존하는 두 가지 언어


인간의 언어적 존재


프랑수와즈 돌토(Françoise Dolto)는 '인간의 언어적 존재다'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 존재는 전달의 존재이고, 인간 상호 간의 전달을 통해 인간화한다. 진정한 통일적 관계인 상징발생은 말의 관계이다."


어린이의 언어 발달은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 안에서의 상호 작용을 형성하는 심오한 과정이다. 

돌토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 인간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언어 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글은 어린이의 언어 발달 방식에 대한 Dolto의 통찰력을 탐구하며, 가족 내에서 배운 근친상간 언어와 더 넓은 상호 작용을 통해 습득한 사회적 언어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언어 사용의 이러한 차이는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 히키코모리가 되느냐 사회적 존재가 되느냐의 차이로 벌어질 수도 있다.



존재욕망에서 오는 말 배우기


어린아이가 언어를 배우고자 함은 존재욕망에서 비롯된다. 

아이는 대화를 나누는 부모 곁에 있으면서 자기 놀이에 빠져들면서, 동시에 그의 귀는 옆에서 부모가 나누는 대화에 대해 쫑긋해 있다.

아이는 부모의 대화에 대해 귀만 쫑긋한 것이 아니라, 온몸이 쫑긋해 있어 부모의 대화를 흡수한다.

아이가 부모의 대화를 엿듣느라 자기 놀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놀이 세계에 깊이 빠져 들면서도, 동시에 부모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덜 발달한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개념까지 부모의 대화로부터 흡수하여 몸으로 기억한다.

 

어린이의 언어 발달은 세상에 대한 인식과 그 안에서의 상호 작용을 형성하는 심오한 과정이다. 

돌토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 인간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언어 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글은 어린이의 언어 발달 방식에 대한 Dolto의 통찰력을 탐구하며, 가족 내에서 배운 근친상간 언어와 더 넓은 상호 작용을 통해 습득한 사회적 언어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욕망과 모방에 담긴 언어의 뿌리


Dolto는 아이들의 언어를 배우려는 욕구가 존재하고 연결하려는 근본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관찰했다. 

이러한 욕구는 아이들이 대화 중에 부모의 몸짓과 표정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부모의 정서적 신호와 몸짓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모방한다. 

이러한 모방은 부모의 감정에 동조하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여 언어 습득 과정을 시작하려는 어린이의 열망을 의미한다.


근친상간적 언어

어머니가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더라도, 아이는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아이는 어머니의 감정과 보조를 취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아이가 어머니의 감정을 몸으로 흉내 내는 형태로 말의 뜻을 이해하고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태도이다.

아이는 어머니를 모방함으로써 어머니와의 관계를 욕망하며, 어머니의 동작과 표정을 흉내 냄으로써 몸의 언어로 기억하고자 한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어머니를 욕망하는 결과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이라는 결실을 얻는다.

이러한 언어는 아이가 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그러므로 이 언어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식이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서 어머니와의 감정교류를 통해 배운 유아적 몸짓 언어에 불과하다.


사회적 언어

아이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욕망하고자 상상계에 머물다가 3세가 되면 아버지가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상징계로 넘어오는 과정을 밟는다.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이자 관계에 머물 수 없고, '아버지-어머니-나'의 삼자관계를 경험하면서 상징계로 넘어온다.

이때 아이는 몸의 언어인 근친상간적 언어를 극복하게 되고, 상징계에서 유효한 사회적 언어를 배운다. 

그것은 성애화에서 오이디푸스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애화에서 오이디푸스로 

 

인간관계는 근친상간적 관계에서 사회적 관계로 발달해 가는 것이지만, 사회적 관계를 발달시켰다고 해서 근친상간적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 두 가지 관계는 공존한다.

두 가지 관계, 두 가지 언어를 상황에 맞게 잘 사용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성애화

제일 먼저 아이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몸의 감각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성애화가 일어나야 한다.

성애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곧 인간화되는 것이다. 

성애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곧 성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이 바로 성이다.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난다.

남자는 남자로 살고, 여자는 여자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유아 사이의 정서적 및 신체적으로 밀접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만일 아기에게 어머니의 품의 오류로 성애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성애화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성애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화가 안 되는 것이다.

인간화가 안 되면, 원래의 상태, 즉 자폐상태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 경우 어머니는 아이의 몸의 감각을 열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몸의 감각을 열어 줌으로써 성애화가 진행되면, 그 성애화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이 가진 욕망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만일 아기에게 어머니의 품의 오류로 성애화가 잘못 일어날 경우 자기 성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성도착자, 동성애자, 이상 성애자로 성장할 수 있다.


유아기(0~3세): 온몸이 성감대

아기는 온몸이 성감대이다. 

온몸이 성감대인 이유는 감각발달과 감각 통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가 성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아기의 모든 감각은 첫 1년 동안 어머니와의 배타적인 경험(아이에게 오로지 어머니뿐인 경험)을 통해 발달한다.

아기는 어머니의 신체적 접촉을 예민하게 경험하면서 '짜릿함'을 느끼면서 어머니의 인정과 칭찬과 박수를 통해 '뿌듯함'을 경험하면서 감각을 통합해 간다.

아기는 감각발달을 통한 성적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판단하고, 느낀다.

그리하여 남자로서 살아가는 세계와 여자로서 살아가는 세계가 구별된다.

하나의 세계는 둘로 나눠진다.

남자가 살아가는 세계와 여자가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  

다른 말로 하면, 유아기부터 남자아이가 세계를 성애화하는 방식과 여자아이가 세계를 성애화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아기부터 아이들은 각자 세상을 자신의 성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세계를 일평생 다른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아동기(3~6세): 오이디푸스적 성감대   

3세가 되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아버지가 개입해 들어오면서 2자 관계에 큰 혼란을 경험한다.

그동안 온몸이 성감대였다가, 3세가 되면 생식기 중심으로 리비도가 모아지면서 성감대가 몇 군데로 구획화된다.

이 시기에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생식기, 입, 항문, 요도가 성감대라 불린다. 

프로이트는 "성감대 중에서도 오직 한 부분만 성생활에 이용되며 그 밖의 나머지 부분들은 성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목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성애화되었던 성감대는 오이디푸스기에는 승화되어 사회화된다.


과거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 훈계가 필요한 아이의 고집을 꺾을 때 엉덩이를 때렸다.

프로이트는 이를 아이의 근친상간적 언어를 오이디푸스적 언어로 사회화시키는 훈련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는 사랑의 채찍조차도 폭력으로 고발당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사회화되기가 어렵게 되면서, 상징계에 진입하기 힘들다.


손웅적 감독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채벌로 5억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면 그 부모는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자녀는 앞으로 축구사회라는 상징계에 진입하기 어렵다.

꼭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그 아이는 신체의 성애화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오이디푸스로 진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의 부모 자체가 사회화되지 못한 채 성애화 단계의 언어, 즉 근친상간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두 언어의 공존


사람은 두 가지 언어, 즉 근친상간적 언어와 사회화된 오이디푸스적 언어를 상황에 맞게 모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근친상간적이라 하여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근친상간적 욕망은 유아기에는 어머니 또는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의 자리와 아버지의 자리에 근친과 거리가 먼 대상을 찾아 내게 되어 있다.

그런 대상을 찾게 되면, 그(녀)는 콩깍지가 씌게 된다.

콩깍지가 씐다는 것은 그때부터 둘 사이에는 근친상간적 언어, 즉 성애화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성애화 욕망을 상대방에게 투사하게 된다.

성애화된 언어는 철저히 2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이다.

제삼자가 들으면 닭살 돋고, 유치 찬란하고, 성인답지 못해 보이지만, 성애화된 언어를 공용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두 사람이 성애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


부부가 성애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늘 사회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상정해 보라.

그런 부부는 서로 육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친밀해지는 관계와 성애화 언어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끼리 왜 이래?"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성애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부부도 외부의 공동체(종교 모임, 동창회 부부모임, 동호회 모임 등)에서는 두 사람이 커플로 움직여도 거기서는 성애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회화된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면서 가정적인 친밀감과 사회적 복잡성을 이해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한편으로 부모의 성애적 관계를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 상징계 영역에서 가족 내 삼각관계, 특히 아이, 어머니, 아버지 사이의 역동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 결과 성애화 언어를 탐색하고 초월하면서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이러한 전환은 사적이고 가족적인 의사소통에서 보다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전환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언어 발달을 통한 자녀의 의식 전환


이처럼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의 성애화 언어에서 더 넓은 공동체의 사회적 언어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직계 가족을 넘어 사회의 규칙과 규범을 통합하면서 상징적 교환에 참여하는 아동의 능력으로 특징지어진다. 

사회적 언어는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더 큰 사회 구조로의 통합에 매우 중요하다.


Dolto는 이러한 진행에는 어린이의 초기 친밀한 욕구와 의사소통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상호 작용 형태로 변환되는 승화 과정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승화는 아동이 사회적 규범 내에서 개인적인 관계와 기능을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아이의 이러한 발달을 통해 정체성을 세우는 과정에서 먼저 한 개인의 존재 단위로 자신을 인간화할 수 있게 되고, 부모와의 삼자관계 경험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 도약하게 된다.


결론

어린이의 언어 발달 과정은 타고난 욕구, 가족 상호 작용, 사회적 통합 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이다. Françoise Dolto의 통찰력은 아이들이 가족 내에서 근친상간 언어 학습에서 더 넓은 사회적 의사소통에 필수적인 사회적 언어 습득으로 어떻게 전환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제공한다. 

이 과정은 상황에 맞는 의사소통의 중요성, 몸 감각을 통한 세계 이해를 위한 변혁적인 힘, 아이의 언어적, 정서적 발달을 형성하는 데 있어 부모의 상호작용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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