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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투사적 동일시

권위적 아버지와의 무거운 침묵


초등 3학년 즈음, 나는 아버지와 단 둘이 목욕탕을 갔다.

아버지와 목욕탕을 단 둘이 함께 간 유일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나 역시 감히 아버지께 말을 걸 엄두를 못 내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랐다.

집에서 목욕탕까지 30분을 걸어야 하는 긴 시간과 거리를 우리는 침묵으로 감당해 내야 했다.

얼마나 무서운 아버지였는가?

아버지의. 체격은 남달랐다. 

당시 남자 평균키가 165cm가 되지 않았고, 별로 먹을 것이 없는 시절이라 모두 말라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180cm에 100kg의 거구였다.

아버지 옆에 붙어 다니는 나는 조그만 껌딱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의 마음 안에서도 감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마치 내가 거구의 아버지를 업고 가야 하는 불안감이었다면, 목욕탕이 가까워지면서 아버지가 나를 업고 가는 가벼운 경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긴 침묵의 경험이 아버지를 덜 무서워하는, 조금은 현실적인 아버지로 다가오는 계기가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날 목욕탕에서 나는 아버지 눈치 보지 않고... 그리고 아버지가 나와 함께 목욕탕 안에 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목욕탕 안의 수많은 사람들을 헤쳐 가며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바로 함께 목욕탕 가는 기억이다. 

누군가와의 침묵은 늘 있기 마련이다.

침묵은 불안을 극복하게 만드는 특효를 가지고 있다.


상담 세션 중의 침묵


상담에서 침묵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상담 세션 중 침묵은 종종 내담자와 상담자 모두에게 위압적이고 불편한 경험으로 인식된다. 

불안감, 불안감, 심지어 좌절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내담자는 침묵의 불편한 공허함을 두려워하여 논의할 주제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초보 상담사는 대화로 그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이러한 침묵의 순간을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침묵의 중요성을 이해하면 이러한 순간을 강력한 치료 도구로 바꿀 수 있다.


<자폐-접촉 자리> 경험으로서의 침묵


Thomas Ogden의 <자폐-접촉 자리> 개념은 유아 초기(탄생 이후 2개월간) 인간 심리학의 원초적이고 감각 중심적인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이 사전 상징적 모드는 경험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감각적 경계와 공간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모드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은 자신의 형태를 잃고 끝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강렬하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나와 어떤 내담자와의 침묵이 진행될 때,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처음과는 다른 상태로 자세를 전환했다.

25분이 될 때, 그녀는 매우 안정감을 회복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느낌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건강검진을 받을 때 수면내시경을 절대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면내시경을 했을 때 수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나락으로 한없이 한없이 빠져드는 공포를 느꼈거든요. 나중에는 컴컴한 우주 공간에서 계속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침묵을 하면서 처음에 바로 그런 공포를 느꼈어요. 상담자에게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요. 약 15분이 지나면서 정신이 좀 들었어요. 20분이 넘어가면서 좀 안정감을 찾게 되었어요."

그녀의 증상은 이인증이었다.

그날의 침묵은 그녀의 이인증을 치료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 아들을 기다리는 집안에서 5번째 딸로 태어나 3일 동안 어머니 머리맡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엄청난 공포를 경험했다.

그리고 40대에 이인증으로 깊은 공포 속에 빠졌던 사람이다.

그녀가 처음 왔을 때 얼굴은 초주검의 상태로 마치 시체가 걸어가는 듯하였지만, 4년에 걸쳐 상담이 끝날 때에는 생생한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얼굴을 가지고 떠났다.  


그녀는 상담실에서 침묵을 경험하면서 특별한 투사적 동일시를 경험한 것이다.

유아기의 상황이 투사적 동일시로 상담자와의 침묵 속에서 재연되었고, 상담의 안전한 틀 안에서 침묵의 공포를 극복해 냈다. 

침묵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감정과 불안이 뒤섞여 잠재적인 심리적 변화를 가져오는 투사적 동일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침묵의 시간 동안 나의 아버지 경험과 이인증 그녀의 어머니 경험이 겹쳤고, 나의 경험은 그녀가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침묵, 중간영역에서 뒤틀리는 불안


자페-접촉자리, 피부와 리듬의 역할

<자폐-접촉 자리>에는 피부 표면과 리듬이라는 두 가지 기본 차원이 포함된다. 

피부 표면을 만지면 개인은 자신의 존재의 경계를 경험하고 일관성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감각을 통합하고자 할 때, 피부를 스스로 때리거나 나무에 부딪혀 보거나, 맨발로 땅을 걷는 것은 <자페-접촉 자리>를 경험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몸을 흔들거나 흥얼거리는 것과 같은 리듬 활동도 비슷한 목적을 수행하며 통일감과 존재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동은 종종 불안이나 고통의 기간 동안 강화되어 경계심과 응집력을 유지하는 대처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침묵을 통한 관계 구축

상담의 맥락에서 침묵은 단순히 말의 부재가 아니라 중요한 심리적 과정이 일어나는 공유 공간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존재가 중첩되는 물리적 시간이자 심리적 공간으로서 심오한 상호작용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침묵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감정과 불안이 뒤섞여 잠재적인 심리적 변화를 가져오는 투사적 식별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관계와 신뢰가 발전하려면 상담자와 내담자 모두 침묵의 도전을 헤쳐나가야 한다. 

처음에는 침묵이 내담자의 불안을 증폭시켜 그들 사이의 중간 공간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러나 상담사가 전화나 소셜미디어 등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요인으로 침묵을 깨지 않고 내담자의 불안을 수용하고 참아주면서 내담자는 불안 강도가 감소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침묵 통해 불안을 변화

장기간의 침묵은 그 자체로 치료적 개입이 될 수 있다. 

상담자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현존하고 지지할 때, 불안을 견디고 억제하는 내담자의 능력이 커진다. 

이 과정을 통해 내담자는 탄력성과 더 강한 자아감을 개발할 수 있으며 결국 근본적인 불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중간영역의 뒤틀림, 불안의 뒤틀림

상담 시 침묵은 치료 과정에서 강력하면서도 도전적인 요소이다. 

Ogden의 <자폐-접촉 자리>의 렌즈를 통해 침묵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내담자의 감각적, 심리적 경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다. 

침묵을 포용함으로써 상담사는 중요한 심리적 변화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회복력을 키우며 내담자와 자신 사이의 더 깊은 연결을 조성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특히 이인화를 경험하는 내담자의 경우 정신병과 감각 통합을 다루는 데 있어 필수적인 치료 도구로서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담실에서 두 사람은 침묵의 시간에 가장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중간공간은 두 사람의 '자기 다움의 존재'를 서로 교환하기도 하고 존재가 뒤 섞이기도 한다

침묵 초기에는 각자의 불안을 끄집어내어 중간 공간을 뒤 틀기도 할 것이다.  

상담자의 불안이 내담자의 불안에 맞서 합이 맞는 칼싸움을 하면서 그 공간을 잠잠하게 만든다

침묵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상담자가 내담자의 불안을 받아내게 되면내담자는 불안의 강도가 약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투사적 동일시가 일어나니까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내담자의 불안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내담자의 유약한 마음은 그만큼 강해지고 불안을 스스로 담아내고 견디는 내성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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