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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에게 투사적 동일시를 일으키는 존재

칼 지브란의 예언


중동의 어느 예언자는 이르길, 


당신 자녀는 당신 자녀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갈망하여 태어난 생명의 아들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당신을 거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을 뿐 당신의 분신이 아닙니다.” 

(Your children are not your children.

They are the sons and daughters of Life’s longing for itself.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사람은 모두 필연적 존재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은 필연적 존재로 묘사된다.

한 나라를 세우는 영웅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나라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웅은 필연적 존재로서 한 나라를 세운 자이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어떤가?

많은 현대인 중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왜 자존감이 낮은가?

영웅 중에 자존감이 낮은 자가 어디 있었던가?


모든 사람은 '나(I)'라는 나라를 세우는 영웅이다.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나'라는 사람은 우연적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사랑이 없었다면, 바로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태어날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어떻게든지 자기 배에서 태어나는 아이를 필연적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태몽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자녀에게


  "내가 너를 가졌을 때, 하얀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서 어흥~ 하고 표효하는데, 온 동네가 쩌렁쩌렁 울렸고, 온 나라가 진동을 하더라"

하는 태몽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아이는 그 신화적인 태몽을 자신의 존재 기원으로 삼게 되고, 내가 이 땅에 필연적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세상에서 자신이 어떻게 우뚝 서야 할지 미래를 꿈꾸게 된다. 

그렇지만 한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은 잉태할 때에나 조작되는 태몽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존재하고자 하는 사례들 


사례 1

내가 직장 다닐 때 일이다.

동업계 상호 정보 교환을 위한 업무를 나의 신입 동료에게 맡겼다. 

그 신입은 매일 그 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업무를 이상할 정도로 즐거워했다.


어느 날, 그는 멘토의 위치에 있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회사에 왔다 갔다 하는 중에 그 회사 여직원과 눈이 맞아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고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지"


라고 했다.

그의 고민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여직원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소녀였고, 그녀 위에는 24세의 미혼 오빠와 29세의 미혼 언니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밀어붙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능력 있는 사람부터 먼저 가는 거지 뭐"


결국 그들은 임신 6개월이 되는 달에 결혼했다.


사례 2

내 아내가 아는 8살 위의 선배언니는 오랫동안 군 간호 장교로 근무했다.

결혼할 엄두를 못 내던 중에 38세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였지만, 아기를 가진다는 것은 서로 포기한 상태에서 한 결혼이었다.

피임을 하지도 않았지만, 임신을 할 것이라고는 내외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15살 아래의 조카가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시기심이 발동되면서 뜸하던 부부관계를 자주 가지게 되면서, 어느 날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42세에 딸을 낳았고, 그다음 해에는 아들을 낳았다.


사례 3

남편은 판사이고, 아내는 소아과 의사이다.

누가 봐도 금슬이 좋아 보이는 결혼생활과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빼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는 가운데 15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별문제 없이 잘 영위해 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 봤지만, 남편도 아내도 임신을 못하는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는 첫사랑이었던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다시 헤어졌다.

그러는 중에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지금은 15세가 된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매우 복잡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의기투합하여 잘 지내려고 하면 어머니가 끼여 들어서 둘 사이를 떼어 놓거나 좋은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편은 아들과 잘 지내는 꼴을 못 보는 아내가 이해가 안 되었고, 아들은 그런 와중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그 문제를 놓고 상담을 요청하였다.

나는 모두를 위해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유전자 검사를 해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누구보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다.

그래야 그 아들이 정체성을 찾아 혼돈을 겪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관계적 혼란은 가족 각자가 겪어내야 할 마땅한 고통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년이 지난 후, 그녀는 내게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내게 구했던 조언 외에도 2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해 본 결과, 결론은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 박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아들의 유전자 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아버지와 아들은 <친자 관계> 임이 확인되었다.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칼 지브란만 말한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아동정신분석가 프랑수와즈 돌토도 유사한 말을 했다.


위의 첫 번째 사례를 보면, 아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눈이 맞게 하고 콩깍지를 씌워서 서로 사랑하게 함으로써, 속도위반까지 일으키면서까지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했다.


두 번째 사례에서도 아기는 어머니가 조카의 임신과 출산을 지켜보면서 시기심이라는 형태를 갖추게 하면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세 번째 사례의 아내의 경우, 만일 첫사랑을 만나 열렬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무임신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기는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첫사랑을 만나게 함으로써 사랑의 리비도의 차원을 끌어올렸고,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아버지와 성관계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러한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자 하였다.

만일 어머니가 첫사랑을 만나 뜨겁게 사랑하지 못했다면, 남편과는 계속 sexlss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아들은 태어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투사적 동일시

어떤가?

꼭 위의 세 경우의 사람들만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겠는가?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도, 아기는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은 부모에 의해 우연하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고자 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부모의 사랑과 마음과 몸을 움직여 결국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 각자에게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투사하여 아기가 원하는 모양대로 실행하게 만든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투사적 동일시의 최초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부부가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아기가 부모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 즉 투사적 동일시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자녀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녀가 자기 존재를 잘 실현 가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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