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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은 '어린아이같이 되기'이다


삶의 여정: 목적지 = 출발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여정을 최종적으로 완료했을 때, 앞의 글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존재의 기원으로 돌아가며 그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된다는 관점은 영국 시인 T.S. 엘리옷(T.S. Eliot)의 시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엘리옷은 삶의 여정이 결국 우리를 출발점으로 다시 이끈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유는 신학적, 철학적 사고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시간의 순환과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는 듯한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비경험

이와 같은 통찰은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삶과 업적에서도 발견된다. 

아퀴나스는 그의 주요 저서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통해 신학적, 철학적 담론에 혁신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생애 말기에 이르러 기도 중에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했다고 전해지며, 그 이후 그는 자신의 필을 꺾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의 학문적 여정과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실제로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를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그가 본 것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죽음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종착지로서,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퀴나스가 자신의 죽음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가 목격한 것은 단순히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궁극적 진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그가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신적 진리와 신비의 깊이에 도달했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반면에 이러한 깨달음은 그가 더 이상 글을 쓰는 것을 무의미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이해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지식 탐구는 불필요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은 일생에 걸쳐 쌓아온 삶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삼차원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의 찰나적 체험인 것 같다. 

이는 거룩한 신과의 만남, 그리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쌓아올린 이성의 높은 탑을 모두 초월하는 경험이다.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성적 판단과 논리적 추론으로는 잡히지 않는 죽음의 신비를 살아 있는 동안 미리 본 것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아퀴나스가 자신의 유년기를, 즉 순수하고 무구한 상태로의 회귀를 목격했을 가능성이다. 유아기는 인간 존재의 시작이자, 삶의 근원적인 무의식적 기억이 응축된 시기이다. 

어린 시절로의 회귀는 순수함과 신비를 되찾는 것이며, 이는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궁극적인 완성을 상징할 수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신적 본질의 진리를 직시함으로써 다시금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갔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아퀴나스가 필을 꺾은 사건을 단순한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이루어진 심오한 변화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더 이상 언어와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경험했으며, 그로 인해 더 이상의 기록은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 순간, 아퀴나스는 자신의 모든 학문적 업적을 넘어서는 차원에 도달했으며, 그가 평생 추구했던 신적 진리와의 일치점 가까이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존재와 진리,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그의 경험은 모든 인간이 결국 맞이하게 될 궁극적인 순간을 암시하며,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처음으로 돌아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시점임을 보여준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이처럼 변해 간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단순해지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게 되며, 어릴 적에 즐기던 간식을 찾게 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주들과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레크리에이션 지도자들이 노인을 위한 놀이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적용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딱 맞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아이처럼 변한다.

따라서 100세에 가까운 노인의 정신 연령이 거의 갓난 아기 수준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나이 40이나 50이 되어서 유아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치매이다.

치매란 최근의 기억일 수록 다 잊어 먹고, 먼 옛날의 기억일 수록 더욱 생생해 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치매에 걸리면 똥칠을 하는 등 애기 짓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100세가 가까울 수록 아기가 되어 가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이다.

100세가 가까울수록 아기가 된다는 것은,  그(녀)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유치해 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영어로 'childish'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나이가 든다고 다 유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내면성숙을 위한 노력을 해 온 사람의 경우는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지면서 성숙한 모습으로 영화를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늙어가는 것을 'childlike'라고 표현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마 18:3)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childish(유치한)'와 'childlike(어린아이 같은)'의 두 단어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 두 단어를 극명하게 구별해 주는 화가가 있다. 

바로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o)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에는 4년이 걸렸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쳐야 했다."


실제로 어린아이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대조해 보면, childish와 childlike의 차이를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숙한 삶이란, '어린아이 같이 되기'라는 점을 기억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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