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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과 진공, 그리고 초자연적 보상

                            보상의 필요성


보상의 필요성, 자기가 준 것과 같은 대가를 받아야 할 필요성. 그러나 만일 이 욕구를 누르고 빈 공간을 남겨 두게 되면, 흡인작용이 일어나며 초자연의 보상이 찾아오게 된다. 초자연의 보상은 다른 보답이 있을 때는 오지 않는다. 비어 있어야만 불러들일 수 있다. 빚진 것을 면해 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이것은 타인이 우리에게 끼친 피해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인에게 베푼 선행에도 관련된다). 이 경우 역시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 진공을 받아들여야 한다. 운동이 영역. 자기 자신의 내부에 진공을 받아들이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대가 없는 행동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는가 에너지는 다른 곳으로부터 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속의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이것은 절망적인 일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진공이 만들어져야 한다. 진공 어두운 밤. 칭찬과 동정(특히 이 두 가지가 섞인 것)은 실제의 에너지를 제공한

다. 칭찬과 동정을 얻으려 하지 말 것. 자연적인 보상도 초자연적인 보상도 없어야 한다.


                      (프랑스 여류철학자, Simone Beil, [중력과 은총]에서)



                          보상욕구와 나르시시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행한 만큼의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애의 부족 때문이다.

즉 해결하지 못한 채 자기애가 비어 있는 상태인 나르시시즘의 문제이다. 

만일 내가 행한 만큼 보상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기애가 덜 채워졌기 때문이다. 

자기애가 덜 채워지면, 내가 행한 만큼 되돌려 받는 것이 없을 때 '억울함'의 감정이 찾아온다.

억울함은 원한 감정을 낳는다. 

나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억울함을 벗으려고 한다.

그래서 빈 공간을 남겨둔다. 

이 빈 공간은 '애착'을 낳는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줄 때, 그 대상에게 애착을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데, 그 사람만큼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싶으면 그 사람은 남달리 특별해 보인다.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사람하고 만의 배타적 관계를 맺게 한다.

배타적 관계란, 그를 배타적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만 남겨두고 다른 모든 사람들 배타적으로 보는 관계를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유아기에 어머니와의 관계를 배타적 관계로 경험한다.

이런 배타적 관계에서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자기애를 채운다.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자기애(그것을 '일차적 자기애'라 부른다)를 채우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늘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주체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 분산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이 자신의 주체가 된다.


위의 시몬 베이유 글은 이렇게 타자들에게 주체를 빼앗긴 나르시시스트가 자기 안에서 주체를 회복하는 방편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은 것 같다.     



                 보상욕구와 진공


Simone Weil은 이 글에서 보상과 자기희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영적 성찰을 담고 있다. 

Weil는 우리가 베푼 선행이나 타인이 우리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는 자연스러운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이 욕구를 억누르고 마음속에 빈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초자연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초자연적인 보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즉각적인 물질적 보상과는 달리, 더 깊은 차원의 영적 보상을 의미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준 만큼의 보상을 받고자 한다. 

이는 기본적인 인간 심리로, 우리가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거나 어떤 희생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라도 이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Weil은 이 보상의 욕구를 억제하고, 마음속에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억울함의 보복 악순환


베이유가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에게 이 빈 공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대인관계에서의 인과관계를 떠나 초자연적 보상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한다.

사람이 대인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인과율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거기에는 억울함의 감정, 원한 감정이 남아 있게 된다. 

그런 감정이 남아 있게 되면, 감정의 삼투압 원리에 의해 그것은 다른 형태의 대인관계에서 다른 모양으로 수행해 내게 되어 있다.

즉 내가 나보다 힘 있는 자에게 갑질을 당한 결과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머물게 되면, 그 억울함은 원한 감정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그 원한을 풀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된다.

만일 내가 을의 입장에서 있을 때, 갑에게 당했다면, 내가 갑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인과율의 역 삼투압의 원리가 발생하게 되면서 내 앞에 있는 을에게 보복을 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군 입대하여 최말단 졸병으로 있을 때 당했던 것을 나의 계급이 올라가면서 나의 부하 졸병에게 내가 받은 대로 그래도 되돌려 주는 형태이다.

이렇게 되면 억울함, 원한 감정의 악순환이 계속되기 마련이다.


       진공의 중요성

이러한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과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내면에 악을 보유한 인간으로서 그런 인과율의 고리를 끊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인과율을 끊을 수 있는 힘도 있다. 

원인이 발생하면 즉시 결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바로 완충공간이다.

사람됨이란 바로 이 완충공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 공간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에 달려 있다.

일단 완충공간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공간을 키워나갈 수 있는 것 또한 그 사람의 능력에 속한다.

그 능력은 바로 문화, 예술, 인문학, 영성 등 중간영역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완충공간을 키워내는 기제들이 작동하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진공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완충공간이 넓다고 해서 이런 진공상태가 자동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완충공간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기애가 충만해야 한다.

자기애가 일정양을 채우게 되면, 그것은 일차적 자기애가 충만한 상태가 되면서, 한번 충전은 영원한 충전이 된다.

일차적 자기애가 충전되면, 필요에 따라 인과관계의 법칙에 따르기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인과관계를 넘어선 초월적 자아를 사용하기도 한다. 

초월적 자아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인과관계 법칙 하에서 발생하는 억울함을 스스로 견뎌내는 힘이 생긴다.

그 억울함을 내가 풀어내지 않아도 초자연적 보상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성경에도,


    "내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라


나르시시스트(자기애가 부족한 사람)가 잘하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종종 타인을 판단함으로써 자신을 우월하게 느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타인을 끊임없이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내적 불안정과 불만족을 반영한다. 

이는 자존감의 저하로 이어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지나치게 판단함으로써 타인과의 갈등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고립을 불러와 외로움과 소외감을 심화시킨다.

판단을 통해 얻는 일시적인 우월감은 성장을 방해하며, 스스로 개선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며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제한한다.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는 이라. 너는 누구 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라고 기록되어 있다.


Simone Weil의 개념을 확장하면, 판단을 멈춤으로써 내면의 진공상태를 만들어 초자연적 보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도록 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면의 진공 상태와 초자연적 보상

  

 내면의 진공 상태

내면의 진공 상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서 모든 판단과 기대, 욕구를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정서적 공간을 비우고 평화와 고요를 찾는 과정이다. 


이 상태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온다: 

명료함과 집중력: 내면의 진공 상태는 마음을 명확하게 하고, 삶의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모든 판단과 욕구를 내려놓으면, 우리의 인식은 더욱 명확해지고 본질적인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정서적 평화: 판단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정서적 평화를 가져다준다. 이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고, 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영적 성장: 내면의 진공 상태는 영적 성장을 촉진한다. 비워진 마음은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영적 깨달음과 연결될 수 있다.


  초자연적 보상

초자연적 보상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형태의 보상이다. 

이는 물질적, 즉각적 보상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영적, 정신적 보상을 의미한다. 

이 보상은 내면의 진공 상태를 통해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

  


내면의 평화: 초자연적 보상은 깊은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이는 물질적인 성취로는 얻을 수 없는 고요한 행복감이다.


통찰력과 지혜: 판단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면, 우리는 더 깊은 통찰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일상적인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하고,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다.


연결과 조화: 초자연적 보상은 우리를 더 큰 우주적 힘과 연결시킨다. 이는 우리가 우주의 조화와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결론

Simone Weil의 개념을 확장하여 판단을 멈추고 내면의 진공 상태를 만들어 초자연적 보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도록 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인간관계, 영적 성장에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이는 우리가 더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며,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과 연결을 경험하도록 한다. 

Weil의 사상은 보상의 개념을 재정의하며,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물질적 보상에 집중하는 경향을 넘어, 영적 성장과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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