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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왜 여자를 두려워하는가?(4)

페르소나와 여성성

페르소나(외적 인격)와 여성성(내적 인격)


남편의 여성성 작업

칼 융은 중년기 남성의 심리적 변화를 설명할 때 이 패러다임(페르소나와 여성성의 관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아동기에는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사춘기에 성적인 개념을 가지게 되면서 성적 욕동에 휘둘리는 자아를 감추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는 자아를 분화시켜서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즉 제1 자아와 제2 자아의 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겉사람인 제1 자아는 차츰 사회인으로서 면모를 갖춰 가면서 페르소나가 되고 제2 자아는 인격의 본질로서 내면화된다.

오랫동안 페르소나를 사용해 온 남자 대부분은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인격을 잊고 페르소나를 표방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가 자기 자신의 본질로 착각하게 된다. 

페르소나를 뒤집어쓴 채 사회생활을 오래 하는 만큼 제1 자아와 제2 자아 사이의 간극은 더욱 크게 벌어지면서, 그 간극의 크기는 내면의 비리로 가득 차게 된다. 

칼 융의 중년기의 의미가 여기서 돋보이기 시작한다.

중년기가 되면 외적인격인 페르소나를 내적인격인 여성성이 끌어내리기 시작하면서, 여성성은 제1자아와 제2자아 사이에 누적되어 온 비리들을 고발한다.

이 과정에서 온갖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페르소나는 견고한 것 같지만, 내면에서는 온갖 치사하고 유치 찬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직장에서 부하직원이 나의 견고한 권위를 박살 내는 사건이 일어나고, 음주 운전으로 면허취소를 당하기도 하면서 술로 인한 온갖 수치스러운 일을 다 당하게 된다. 

이 모두가 그의 내면인격인 아니마(여성성)가 페르소나를 끌어내리기 위한 수작들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는 아내와 자녀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저항과 반항이 일어난다. 

슬하에 있던 것으로 여겼던 자녀들 마저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충고와 훈계를 하기 시작한다. 

견고했던 남편으로서의 체면과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말도 안 되게 추락하는, 갈수록 비참해지는 경로를 밟게 된다.


남자 안에 있는 여성성의 작동으로 기인하는 페르소나의 이런 추락이 계속적인 사회적 자아의 자아실현을 멈추게 만든다. 

평소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페르소나를 통한 자아실현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인격인 여성성을 가지고 자기(self) 실현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아내의 여성성 작업

남성의 여성성의 작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회적 페르소나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여성성을 투사하는 현실적인 대상인 아내의 여성성의 항의를 듣고 그녀의 여성성을 내면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와 부단하게 싸워야 한다.

남자로서는 이렇게 아내의 여성성을 수용하기 위해 아내와 싸워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다. 


왜 여성성은 부부로 하여금 꼭 싸우게 만드나? 

그 이유는 결혼 후, 아내가 남편이 원하는 바대로 사느라 모성성을 가지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나 하나만 참으면 모든 상황이 평화로워진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남편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유지하면서 돈 잘 벌어다 주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자기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주장들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밖에서는 이런저런 사고를 쳐도 아내는 남편의 자잘한 상황들을 다 이해해 주느라 바빴다.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이해를 못 하나 보다 싶고, 남편이 반찬투정이나 집안일 또는 자녀의 일을 못 챙긴다고 불평하면 내가 친정에서 가정교육을 잘 못 받아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심지어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어도 '그럴 리가 없다'라고 눈을 감아주고 마음을 추스르기 바빴다. 

어쩌다 남편이 어떤 여성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목격하여 마음이 뒤숭생숭해지면, '내가 하필이면 왜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게 되어서 그런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가?'라며 자책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저런 온갖 일들이 겹치고 누적되어 오는 중에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지기 시작한다. 

그때가 대체로 중년기 중반 이후 갱년기에 이르는 기간이다. 


그동안 한쪽으로만 굽던 빈대떡은 반드시 다른 쪽으로 뒤집어 구워져야 한다. 

이때부터 부부간 중년기의 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서로 다른 기억

 그동안 여자는 남편에게 모성성을 지나치게 사용해 온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물론 그 생각은 의식적 사고가 아닌, 무의식적 사고이다.

남편이 이런저런 부족한 면모들을 참아주고, 견뎌주고, 버텨주고, 지지해 준 결과 여자에게 남는 것은 상처뿐임을 자각하게 된다.


남편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오랫동안 사회적 페르소나를 사용해 온 결과 사회적 성취와 성과물을 얻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가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해 왔나' 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뿌듯함을 ㄴ낀다.

그러나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의 그런 노력을 해 온 것은 당연한 것에 불과하며, '그동안 내가 남편으로부터 얼마나 상처받았는가?'를 기억하게 된다.


그동안 모성성을 사용해 오면서 어떻게든 남편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 온 것이 억울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갱년기가 되면, 아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갖 억울함들이 생생한 기억의 영역으로 올라온다.

그 기억은 절대 의식적인 기억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 잊은 기억들인데, 오랜 세월 몸에 새겨진 상처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남편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제2의 피해를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그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아내가 되새김하는 기억들에 대해서는 이미 머리의 기억 영역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는 중에 남편이 어쩌다 공통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남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동일한 상황에 대한 동일한 기억'인데, 왜 아내는 저렇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왜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지?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집단적 사고에서 개별적 사고로

아내는 더 이상 남편을 모성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내는 오랜 세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남편에게 되돌려 줄 일만 남았다. 


여자가 '모성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여자는 '집단적 사고를 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여자는 남자보다 오지랖이 넓은데, 얼마나 넓냐 하면, 9배의 크기로 넓다.

그래서 9배 크기의 모성성을 가진 여자는 9배의 능력을 남편에게 다 발휘할 수가 없어 집안에서 온갖 것을 다 챙긴다.

자녀를 챙기는 것은 물론, 베란다에 수많은 나무를 키우고, 여러 마리의 앵무새를 키우고, 세 마리의 강아지에 고양이까지 키운다.


그러다가 여자가 갱년기에 이르면,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 서서히 억울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오랜 결혼 생활동안 한 사람의 여자로 살지 못하고, 모두의 어머니로 살았던 것에 대해 원통함이 올라온다. 

갱년기가 되면서 여자는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면서, 그 원통함은 어느새 분통을 터뜨리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억울함을 해소하는 데 있어 날이 갈수록 그 표적이 분명해진다.

바로 남편이 자신에게 '이런 여자로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투사해 온 그 '여자'는 바로 현모양처였고, 그 기능은 모성성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여자는 '나는 what을 위해 살았지, who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억울함의 구체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외수의 수필집 [여자는 여자도 모른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는 오랫동안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산다.

여자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성을 차용해 사용해 왔고, 결혼해서도 모성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한 번도 <여성성>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존재의 억울함>의 본질이다. 


갱년기 여성은 더 이상 모성성으로 살아갈 생각이 없다. 

그러한 집단적 사고를 멈추고 이제는 본래 인격인 여성성으로 살면서 개별적 사고를 하면서 살기로 작정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그동안 모성성으로 살아온 억울했던 삶을 지우기 위해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돌려주기로 작정한다. 

이때 아내는 더 이상 집단적 존재가 아닌, 개별적 존재로서 여성성을 끌어올리게 된다.


이러한 되돌려주는 과정에서 남편은 아내의 여성성을 직면하게 되는데, 그 여성성은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다.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낼 때 남편은 자신이 저지른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고 싶고, 귀를 막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직면하고 싶지 않으며,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아내는 상처받은 이야기를 한두 번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했던 이야기 또 하는 형태로 반복한다.

남편이 아내가 받았던 고통을 처절하게 아파하는 형태로 되돌려 받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부부는 함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의 상처는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면서 가져갈 때에야 마음속에서 지워지게 된다. 

그것도 남편이 한번 고통스러워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안별로 고통을 느껴야 아내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런 끔찍한 일은 수년, 수십 년 계속될 수 있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를 되돌려 주는 과정에서 모성성 모드에서 벗어나 본래적 인격인 여성성을 찾아온다.

반면 남자는 이 과정에서 철들기 시작한다.

남자가 철든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유능함이나 높은 지식을 갖추는 것,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 많은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리더십 등과는 일체 무관하다.

남자가 철든다는 것은 사회적 페르소나와 사회적 유능함을 내려놓으면서 자기 내면의 여성성을 인식하고 아내의 여성성을 직면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즉 남자가 철든다는 것은 아내를 알아가는 것이며, '아내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남자는 철들면 죽는데, 거꾸로 죽기 위해 철들려는 사람이 있다.

나의 작은 아버님은 92세 때 어느 날 가족들을 다 모아놓으셨다.

작은 아버님은 제일 먼저 아내에게 무릎 꿇고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잘못을 일일이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셨다.

그리고는 자녀 한 사람 한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일일이 용서를 구하셨다.

그때 가족들은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을 후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남자를 철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배우자의 여성성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배우자의 여성성을 만나는 과정은 너무나도 끔찍하다.

대부분 남자는 배우자 여성성을 회피하고 교묘하게 빠져나오는 법을 터득한다.

내 친구 중에는 아내를 교묘한 농담으로 절묘하게 피해 가는 법을 배웠다.

그 친구의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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